[심심파적] 날로 먹는 중국의 역사 개략

 




삼황오제 시대

 

삼황이란 복희씨, 여와씨, 신농씨를 이릅니다.

환상 속의 그대 수준으로 신적 존재에 가깝습니다.

 

오제는 황제, 전욱, 제곡, 요, 순을 이릅니다.

 

황제는 황하, 황토와 같은 황자를 쓰며 오늘날

한족 중심의 중화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황제와 신하들은 한족의 가장 큰 라이벌인

치우와의 전쟁에서 이를 패퇴시킵니다.

(이 전쟁 에피소드에 지남철이 등장합니다)

 

전욱과 제곡은 그냥 중간 교체요원으로 언급되며

요와 순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목가적 유토피아

시기를 상징하는 그 요, 순입니다.

 

이제 선양으로 사이좋게 자리를 넘겨주던 시기는

지나고 세습왕조로 이어지게 됩니다.

 

선사시대 하왕조

 

최초의 왕조인 하는 아직 역사 시대의 왕조로

인정받지는 못합니다.

 

순 임금 당시 황하의 범람을 막는 치수 담당관이던

우는 유능함을 인정받아 선양을 받고, 우의 후계로

후손들이 물려받으면서 왕조로 전환됩니다.

 

하왕조의 마지막은 그 유명한 걸왕(폭군의 대명사)이

장식하며 최초의 경국지색으로 매희가 등장합니다.

 

결국 무리한 강남원정과 주색잡기로 하왕조는

신흥세력인 은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역사시대의 개조, 은왕조

 

은을 연 성탕(탕왕)은 은허를 도읍으로 하고

은왕조를 엽니다. 이 시기부터는 역사적 유물이

발굴되기 때문에 역사시대로 간주합니다.

 

은왕조의 세력권은 황하 이남 일대로 보고

있습니다. 은왕조 역시 부지런히 주변부로

세력을 넓혀갑니다.

 

그 결과 지금의 섬서성에 가까운 주나라

일대가 편입이 됩니다.

 

은나라의 서쪽 백작(서백)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한 은 왕실의 혼란 속에서 세력을 굳히고

제후들의 중심이 되어 갑니다.

 

하왕조의 걸왕과 함께 폭군의 대명사로 남은

은왕조의 주왕(합쳐서 “하걸은주”)은 역시

경국지색의 미녀 달기에게 빠져 주지육림을

만들고 포락의 형이라는 잔혹한 형벌을 만드는

등 폭정을 거듭하던 끝에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이에 관련해선 왕조를 교체한 주나라의 입맛대로

은의 주왕을 폭군으로 몰아가려는 왜곡이란 해석도

만만찮게 존재합니다. 오히려 과도한 남방원정을

은의 쇠망요인으로 꼽는 경우도 많습니다)

 

주의 시조가 된 문왕은 왕조를 개창하지 못한 채

사망하고 어린 무왕이 군대를 일으켜 은의 주왕을

죽이고 새로운 왕조를 엽니다.



 

주 왕조의 전반 - 후반

 

이제 서쪽 세력이 주나라를 세웁니다.

 

초창기엔 은의 후손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정국이 어수선해 결국 은의 잔당들에게 지금의

산동과 안휘 사이 지역을 송나라라는 제후국으로

분봉해 무마시킵니다.

 

이후 활발하게 하북과 섬서, 남방을 개척하면서

영토를 크게 확장하지만 봉건제를 택한 주왕조의

중앙집권에는 한계가 있었고 세력 확대 과정에서

변방 유목민족과의 충돌도 나날이 심화되었습니다.

 

역시 하걸은주에 비견되는 주의 유왕과 여기에

일조한 미녀 포사에 의한 실정 결과 기습적인

북방 유목민족의 침공으로 주는 일차로 붕괴됩니다.

(포사가 비단 찢는 소리를 좋아해 매번 비단을

찢어 재정이 고갈되고, 우연히 변경의 위급을

알리는 봉화가 잘못 오른 것을 보고 “늑대가 나타났다!”

퍼포먼스를 남발한 끝에 실제로 침공을 당했을 때

원군이 오지 않아 망했다는 고사가 전해지지요)

 

이때 망한 주왕조를 서주라 하고 이민족의 침입을

피해 동쪽으로 천도한 후기 주왕조를 동주라 합니다.

 

그러나 동주는 중앙집권을 이루지 못하고 이때부터

유력한 제후들이 난립하게 되어 통일왕조는 사실상

사라집니다.

 

춘추전국시대의 개막

 

이 난세는 그나마 주 왕실을 상징적으로 모시던

춘추 시대와, 주나라? 어디에 먹는 건가요? 하던

전국 시대로 갈립니다.



 

춘추 시대에는 유력한 제후국이 주 왕실을 보필하고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다른 수백의

제후국들을 비상소집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느냐를

놓고 패자라고 불렀으며 ‘춘추오패’가 존재했습니다.

 

춘추오패는 제, 진, 초, 오, 월이 한번씩 차지했고,

이설로는 오/월 대신에 송과 또다른 진을 넣기도

합니다.

 

이 시기부터 점차 남방의 초나라가 강성해지고

오, 월 등 남방계통 국가들이 한 가닥씩 합니다.

 

또한 북방 유목민족의 전술을 도입하거나 서방

오랑캐와 혼합되는 국가들이 생겨납니다.

 

공자 등 제자백가가 이 시기부터 줄줄이 비엔나로

생성됩니다.



 

전국시대는 당시 중국의 중심부를 차지했던 진이

한-위-조로 갈리면서 주왕실의 형식적 권위마저

사라진 시기를 이릅니다.

 

수많은 제후국은 결국 “전국칠웅”으로 통합되며

연-제-초-한-위-조-진이 이들 7국입니다.

 

초창기엔 명장 오기 등을 등용한 위나라가 강성했고

이를 격파한 손빈의 제나라가 흥성했으나 결국에는

상앙의 법가를 채택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합니다.

 

최초의 통일왕조 진

 

진시황, 영정은 39세의 나이로 수백년간의 혼란을

제압하고 천하를 제패하고 40개군으로 전국을

나눠 군현제를 실시합니다.

(장예모의 <영웅>에 등장하던 바로 그 시황제)

 

그러나 과도한 중앙집권화와 거대한 토목공사 등

지친 민심을 몰아붙이던 시황제의 착오는 결국

그의 사망 후 15년이 지나 왕조의 붕괴를 맞게

만듭니다.

 

이 혼란기는 후일 <초한지>로 우리에게 전해내려

옵니다.

 

진승과 오광의 농민봉기 이후 화약고에 불을 붙인

것처럼 수많은 봉기세력이 일어나고 이때를 틈타

멸망한 6국의 잔당들이 세를 얻어 들고 일어나니

진왕조는 금방 멸망하고 이후 봉기군 사이에 천하

패권을 놓고 겨루던 중 결국 유방이 승리해 한

왕조를 열게 됩니다.



 

중화 제국, 한 왕조의 시작

 

한은 초기에 노장사상을 받아들여 지친 민심을

위무하고 농번국가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합니다.

 

외척 여씨의 행패도 있었으나 서민들에겐 꽤

살만한 시절이었습니다.

 

이후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행정 속에서

오초 7국의 난 같은 시련도 겪었으나 초기

한의 황제들은 안정된 국가행정체계와 풍족한

국고를 남깁니다.

 

이를 놓고 당대에 탕진해버리면서 국위선양에

힘쓴 이가 무제로, 그는 고조선과 북방 흉노에

대한 수십 차례의 원정을 통해 지금의 중앙아시아

일대에까지 군현을 설치하는 등 영토를 크게

팽창시키지만 그 결과로 국고는 텅 비고 국력은

쇠잔하게 됩니다.

 

이후 외척 왕망이 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열지만 각지의 반란으로 역시 10여 년 만에 몰락하고

한의 방계 혈족인 유수가 새롭게 한 왕조를 엽니다.

 

왕망에 의해 멸망한 한을 전한 혹은 서한

(수도가 서쪽 장안), 유수가 새로 연 한을 후한

혹은 동한(수도가 동쪽 낙양)이라 부릅니다.

 

후한은 200년도 안 되어 외척과 환관에 의해

농단을 당하고 결국 멸망하는데 결정적 계기는

황건적의 난(혹은 황건기의)으로 이 시기부터

진의 재통일까지를 다룬 작품이 바로 <삼국지연의>

입니다.



 

삼국 분열과 진으로의 재통합

 

중원의 대부분을 차지한 조조의 위를 변경의

촉과 오가 견제하는 천하삼분 구도로 약 50년을

보내고 위의 중신 사마씨 집안이 진나라를 열면서

역시 내부 분열로 쇠약해진 촉과 오를 집어삼켜

재통일을 이룹니다.

 

그러나 이 진왕조는 곧 왕족과 외척들의 분란으로

혼란을 겪으면서 강성해진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에

노출됩니다.

 

그 결과 ‘오호’라 일컬어지는 북방민족들에 의해

중원을 제압당하고 진의 후예들은 강남으로 피신해

명맥을 이어갑니다.

 

이 시기의 황하 일대는 오호십육국 시대,

강남 일대는 오대에 걸쳐 한족 왕조가 이어지게

됩니다.

 

오호십육국 시대

 

여전히 이 시기에도 중국의 중심은 황하 일대로

인구의 75%가 이 일대에 거주했습니다.

 

<오호>는 갈, 강, 저, 선비, 흉노족으로

이들이 중국으로 내려오면서 몽골 초원은

유연이 차지하게 됩니다.

 

이들 중 저족의 전진이 한때 중원을 차지하고

중국 통일을 위해 남진하기도 했지만 비수 전투로

제압되고 곧 무너집니다. 북방을 통일한 것은

한참 뒤의 선비족의 북위 왕조로 이 왕조의 고관

중에서 서위-동위(후일 북주-북제)로 나뉘어

쟁패를 벌이던 중 북주의 유력세력이던 양견이

권력을 차지하고 수나라를 엽니다.

 

수나라는 역시 쇠약해진 강남을 제압해 오랜만에

중국을 통일합니다.

 

당나라 군대가 아시아를 제패하다

 

그러나 수왕조는 문제의 안정된 통치에도

불구하고 2대째인 양제의 무리한 국력과시와

고구려 정벌 실패로 몰락합니다.

 

이 시기에 다시 수많은 영웅호걸이 등장했으나

가장 출중했고 세력기반이 튼튼한 당국공 이연이

천하를 차지합니다.



 

이제 당왕조가 시작됩니다.

 

천하패권의 최대 공신인 차남 이세민은

형 건성과 동생들을 제거하고 태종이 되어

유연에 이어 북방을 장악한 돌궐을 격파하고

강적인 토번과 우호관계를 맺은 뒤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는 등 활발한 대외판도확장에

나서면서도 위징 등 명신들을 등용해 내정에도

힘을 써 이후 ‘정관의 치’라 불리는 태평성대의

기틀을 닦습니다.

 

이후 측천무후가 권력을 쥐고 흔들지만 대외

정치나 백성들 살림살이는 잘 돌봐서 당 왕조는

이후 현종에 이르기까지 전성기를 맞지만 이후

현종이 양귀비와 노닐면서 국정을 돌보지 않다가

안록산-사사명의 난(줄여서 ‘안-사의 난’)으로

쇠락해갑니다.

 

그래도 변방군벌을 견제하면서 몇십년 더

끌어봤지만 황소의 봉기로 멸망하게 됩니다.



 

오대십국의 시대

 

이 시기 북방은 다섯 대에 걸친 왕조가,

남방 중심으로 10개 국이 병립하는 시기가

옵니다.

 

북방을 재통합한 송에 의해 강남과 사천,

산서 일대의 독립국들이 병합되어 다시

송왕조가 들어서지만 이 중간에 지금의

북경 일대인 연운 16주를 거란족의 국가

요에 군사지원을 위해 바치면서 오랜기간

해결되지 않은 북방문제가 탄생합니다.

 



문화국가 송의 탄생

 

송나라는 경제와 학문에 힘쓰고 이민족은

가급적 돈으로 매수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송나라의 군사력이 그렇게 약한 건

아니었고 기병 위주의 유목민족들이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국가체계를 강화하고 북방

기마 산지를 잃어 이들에 대항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화포 등 신무기로 땜빵하고

전쟁비용보다 매수비용이 싸게 먹힌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송나라는 초창기부터 요와 서하 등 이민족국가와

국경분쟁으로 몸살을 앓고, 이후 북방 유목민족

패권교체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다가 결국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강북을 빼앗기고 강남으로

도피해 남송을 엽니다.



 

남송은 경제적으로 여전히 흥성하고 학문도

발달했지만 당대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몽골의 원 왕조에 결국 수십년간의 항쟁 후에

멸망합니다.



 

몽골의 전성시대 - 원 왕조

 

그러나 송나라가 군사력이 약하지 않았던 게

당시 몽골을 상대로 이만큼 오래 항쟁한 나라도

따로 없었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가미가제 덕분이고 바다 건너이니

날로 먹은 측면이 강하죠)

 

원 왕조는 중국 뿐 아니라 당시 변두리인 유럽

일부 빼놓고는 거의 석권한 동네였지만 항상

유목민족의 전성기는 농경민족을 지배하는 순간

몰락으로 치달은 것처럼 특유의 야성과 기동력을

살리지 못하고 통치에 무능함을 드러내며 100년

만에 몰락하고 다시 몽골리아 초원으로 퇴각합니다.

(북원은 수십년 간 더 존속합니다)




 

최초로 강남에서 일어난 명 왕조

 

원 말기에 백련교도의 난 이후 곳곳에서 원

관료와 군벌, 농민봉기 세력 등이 혼합된 반

독립국이 생겨납니다.

 

이들 중 가장 강력했던 주원장이 명 왕조를

열고 북벌을 통해 최초로 강남에서 일어나

북방을 제압한 왕조를 개창합니다.

(김혜린님의 걸작 대하역사순정만화

“비천무”에 이 시기 역사가 상당부분

서술되어 있습니다. 또한 김용님의 극초걸작

무협사극로망 “영웅문려”에도 일화들이

새록새록 녹아들어가 있지요)

 

명왕조는 초기에 지금의 남경을 수도로

하지만 이후 영락제가 조카 건문제를 죽이고

황제에 오른 뒤 북경으로 천도합니다.

 

명왕조는 초창기에 정화의 대함대를 아시아-

아프리카 일대에 파견해 중국식의 조공외교로

팍스 차이나를 열고 북방 유목민족에 대해서도

만리장성을 보수하고 원정에 나서는 등 강력하게

대응했으나 점차 토목의 변 등 한계가 드러납니다.

 

이제 북방의 유목민족과 남방의 베트남 등과의

분쟁에 시달리고 해안일대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면서 거대한 명 왕조는 내부 유지에도

허걱거리게 됩니다.

 

이후 임진왜란에 지원군을 보내면서 한계치에

온 국력을 소진하고 신흥세력인 여진족의 후금에

의해 위기에 처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멸망은 과중한 세금과 탐관오리의

전횡에 항거한 농민봉기였고 결국 대군을 북방에

고정시켜둔 채 농민반군에 의해 수도 북경이 함락을

당하면서 명나라는 멸망합니다.

 

그러나 명나라의 북방 수비군은 농민반군보다

차라리 후금 - 청 왕조에 귀순하는 바람에 만주족의

청나라가 들어서게 됩니다.

 

명의 후예들은 강남으로 피해 남명을 열고

유신 정성공은 대만을 경략하지만 결국 국력의

차이로 항복하게 됩니다.



 

청은 초기에 중용했던 투항 한족 장군들이

일으킨 삼번의 난을 잘 제압하고 강희제와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황제들의 장기

집권을 통한 안정 속에서 오히려 중원 왕조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고 오랜 세월

골치였던 서북방의 몽골계 유목민족을 완전히

제압한 뒤 티벳에 침입한 구릉족(오늘날의

구르카 용병으로 유명한)을 격파하고, 러시아

제국과의 동북방 영토분쟁에서도 힘으로

이를 무찌르는 등 전성기를 맞습니다.

 

이 시기에 소위 말하는 “오족 협화의 중국”이

완성됩니다. 한족 중심의 중국이 아니라 조화로운

여러 민족의 공존이라는 상징적 문구가 등장하게

된 것이지요. “오족”은 만주족/몽골족/한족/

위구르 등의 회족/남방-티벳 계통의 장족을

지칭합니다. 물론 실제로 협화하고 지내는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신강-위구르 지역 분리운동과

티벳 무력지배를 통해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지만요.

 

그러나 건륭제 후반부터 어지러워진 국정과

정체를 맞은 내외부 환경으로 인해 점차

국력이 쇠잔해가며, 영국이 무역 불균형 개선을

위해 내놓은 아편 밀무역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처합니다. 그 결과 아편전쟁을 거쳐 빈약한

국력이 뽀록나게 되고 이 전쟁 결과 맺어진

불평등 조약 때문에 과도한 징세를 벌이다

태평천국 전쟁과 2차 아편전쟁 등을 겪습니다.



 

일부 한족 관료들에 의해 부국강병 운동인

양무운동을 벌이지만 껍데기만 베껴온 운동은

국력을 강화하지 못하고 결국 영토를 여기저기

빼앗기고 깔보던 일본에게 패배하는 등 수모를

겪은 끝에 신해혁명으로 몰락하고 맙니다.

 

군벌의 난립과 외세의 준동

 

그러나 손문의 신해혁명은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군벌들이 외세를 등에 업고 난립하는 난세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시기에 대해서는 펄벅의 <대지>나 노신의

작품들 외에도 여러 소개가 있으니 참고하시길.

 

결국 국민당-공산당 합작을 통해 체질을 개선한

손문의 국민당 세력이 손문 서거 후 장개석의

주도 하에 중국을 석권하고 국민당 정부를 엽니다.



 

그러나 이 국민당 정부는 여전히 군벌과의 연합

체제가 강했고 공산당 세력을 몰아내고 탄압하면서

내전의 불씨를 이어갑니다.

 

이 시기 중국에 대한 경제적 착취에 만족하던

서구 세력과는 달리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중국

영토까지 넘보던 일본이 점차 중국의 주적화되고

중일전쟁을 통해 과거 중원의 대부분을 일본이

장악하는 사태에 이릅니다.

 

결국 서안사건으로 장개석은 공산당과 협력해

일본과의 전쟁에 돌입하고 이후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은 지구전을 통해 100만이

넘는 일본군을 흡수한 스폰지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그 과정에서 여전히

부패하고 군벌적 성격이 강했던 국민당에 환멸을

느낀 중국의 많은 대중들은 오히려 공산당을 지지해

내전 결과 1949년에 국민당은 대만으로 퇴각하고

중국 대륙은 공산당의 지배하에 들어갑니다.



 

붉은 중국 그 이후

 

모택동은 중국을 장악한 후 곧바로 항미원조전쟁,

즉 한국전쟁 참전을 통해 사회주의 블록 지원을

아끼지 않고 소련의 지원으로 대만과의 기나긴

국지전에 돌입합니다.

 

국내적으로는 대약진운동을 전개해 낙후한 중국을

빠른 시일 내에 공업국가로 개조하려 했지만 많은

무리수 끝에 기아와 실패로 귀결됩니다.



 

이 결과 모택동의 권력은 상당부분 훼손되고

이를 대신해 실용주의파가 득세합니다.

 

이에 대해 모택동의 친위세력을 중심으로 이러한

수정주의 실용세력에 대한 반발이 조직화되어

나타난 것이 문화대혁명과 주력부대인 홍위병입니다.



 

10년 넘게 중국 내에선 내전을 방불케 하는 혼란이

진행되었고 사회주의 혁명의 근본주의를 고수하려던

문화대혁명은 결국 과도한 혼란으로 귀결됩니다.

 

모택동 사후 권력을 물려받은 화국봉은 4인방이라

불리는 친위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공고히 했으나

이 시기부터 살아남은 과거 수정주의 세력의 수장,

등소평이 권력을 좌우하게 됩니다.



 

등소평은 흑묘백묘론을 펴면서 실용주의와 근대화

노선을 제창하고 이후 현재까지 이르는 중국의

토대를 닦습니다. 서방세력과 급속도로 가까워져

갔지만 1989년의 천안문 민주화운동 무력진압으로

한때 소원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은 새로운 자본주의의 용광로이자 심장이

되어가고 있으며 현재의 후진타오 체제도 기본적으론

등소평 체제에서 연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어느 사이에 중국은 사회주의 혁명을 오히려

구소련보다 더 급진적으로 펼쳐가던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 국가 중심 자본주의 국가로 재빠르게

변신해버린 것 같습니다.

 

혹은 정치적 측면에서 공산당 일당독재의 권위주의

체제를 갖고 나머지 경제-사회적 측면은 자본주의의

역동성에 모든 걸 내맡긴 듯 싶기도 합니다.

 

이 거대한 나라가 과연 이후 어떤 행보를 걷게 될지는

인접한 동아시아 전체의, 그리고 세계 질서에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만큼 이후로도 많은 관심이 요구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상 생각나는대로, 손가락 치는대로 정리해본

마구잡이 중국사 개략이었습니다.

by 붉은10월 | 2010/02/08 18:16 | 뒤죽박죽 밀리잡학 | 트랙백 | 덧글(7)
[심심파적] 센고쿠 다이묘 얼렁뚱땅 가이드

 

그냥 생각나는 대로, 개인 취향대로 호불호 팍팍

넣어가며 기억 속의 센고쿠 다이묘들을 소개코자

합니다.

 



오다 노부나가

 

센고쿠 시대를 정리하는데 기반을 닦은 바로 그 인물.

게임 <신장의 야망>의 그 ‘직전신장’입니다.

 

어릴 적부터 기행으로 유명하며 수많은 명멸해간

센고쿠 다이묘들 중 거의 최초로 ‘천하통일’을 노린

인물이고 절반 이상 작업해놓고 드라마틱한 최후를

맞은 인물입니다.

 

<일기당천 노부나가> 등 판타지 세계의 주인공으로까지

승격될 만큼 신화화된 인물인 동시에 <공작왕> 등

만화에서는 불교를 탄압한 마왕 취급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간토와 기내 지역을 잇는 오와리의 수호인 시바 가문의

대리격인 수호대 종가 오다 가문도 아닌 방계 오다 가문

출신이지만 걸출한 무장이었던 부친 오다 노부히데의

뒤를 힘으로 계승하고 - 골육상쟁을 거쳐 - 당시 상업이

흥성하던 수도권 인근지역의 이점을 최대한 살리고

천하통일의 야망을 병아리 영주 시절부터 집요하게 추진한

인물입니다. 나기는 난 인물이지요.

 

당대의 쟁쟁한 대 다이묘들 및 무장승병 세력들과

처절한 사투를 거쳐 주도권을 장악하는 과정은 당시를

다룬 시바 료타로나 요시카와 에이지 등의 대하소설을

통해 잘 묘사되어 있으며 만화 <센고쿠> 등에도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혼노지의 변 당시 세력권은 석고로 따지면 526만 석,

하지만 지배영역은 지금의 일본 중부지역 대부분으로

규슈 및 간토 동쪽 / 산음-산인 지역 혼슈, 시코쿠 등은

차지하지 못한 한계가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평민 출신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짚신 담당 똘마니에서

후계자까지 뛰어오른, 신분제 사회의 벽을 거의 유일하게

뛰어넘었던 인물입니다.

 

최하급 사무라이(아시가루)부터 시작해 전공을 쌓고

‘목면’ 도키치로라는 별명대로 여기저기 유용한 활약을

많이 해서 오다 노부나가가 불의에 간 당시에 이미

오다 가에서 3-4번 가로 정도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인물이지요. 처음으로 다이묘가 되었던 지역은 북부 오미

지역의 과거 아사이 가 영토였으며 이후 세력을 확장해

일본 전역을 차지합니다.

 

오다 가의 필두 가로였던 시바타 가쓰이에와의 시즈가타케

전투를 승리한 뒤 오다 노부타카, 노부카쓰 등 과거 주군의

아들들을 제압하고, 노부카쓰를 후원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지구전 과정에서 여동생을 시집보내고 어머니를 인질로 잡게

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 동해도(도카이도)의 패자인

도쿠가와 가를 수하에 두게 됩니다.

 

이후 시코쿠의 패자 조소가베 가를 굴복시키고 당시

규슈를 거의 석권할 뻔 했던 시마즈 가도 제압합니다.

 

이후 거의 마지막 남은 관동(간토) 지역의 호죠 가문을

무너뜨리고 오슈의 다테 마사무네까지 제압해 노부나가가

이루지 못한 천하통일을 실현합니다.

 

그러나 가문의 미천함과 너무 늦게 태어난 적자 문제

등으로 1대에 그치고 그의 사후 가문은 무너지지요.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와리 옆 미카와의 호족 마쓰다이라 가 적자로서

어릴 적부터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여기저기 인질 생활을 하고 가문은 쓰러지기 직전에

여러 번 처했지만 보호국이던 이마가와 가문이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크게 패한 뒤 자립합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고 노부나가가 교토로

진출하는 동안 동쪽의 방위를 담당하면서 여러 차례

오다 가를 도와 참전해 백전을 경험합니다.

 

특히 미카타가하라 전투 등에서 당대 최강의 강군이라

불리던 다케다 신겐의 세력과 혈투를 벌이면서 많은

실전경험을 쌓게 됩니다.

 

이후 다케다 가가 멸망하면서 과거 이마가와 가의

전성기 영토인 미카와, 도토미, 스루가 3국을 차지하고

오다 노부나가 사후 혼란기에 다케다 가의 영토이던

가이(고슈)와 시나노(신슈)까지 석권해 도카이도의

패자가 됩니다. (당시 영역은 140만 석 전후)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기나긴 지구전을 거쳐

그의 수하에 들어가는 대신 필두 다이묘의 위상을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누리게 됩니다.

 

이후 관동의 호죠 씨 정벌 후 히데요시에 의해 세키

8주로 영지를 옮기게 됩니다. (240만 석)

 

도요토미 사후 우세한 실력으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에도에 막부를 열고 250년 넘게 지속된 도쿠가와 막부의

시조가 됩니다.



 

모리 모토나리

 

혼슈의 서부 산음-산인 지역 일대와 규슈 북부까지

10국(구니)을 차지한 모리 연방의 창시자로서 사이토

도산, 호죠 소운 등과 함께 센고쿠 시대의 풍운아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모리 모토나리는 혼슈 서부의 유력 다이묘들이

서로 싸우던 시기에 이를 교묘하게 이용해 일본

서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영토를 평생을 바쳐

차지하지만 이후 말년에는 성공에 안주하면서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류의 생각과는 멀어집니다.

 

임종 당시 가문에 보수적인 방위책을 유훈으로 남겨

이후 가문은 오다 가와 대결구도를 취하기도 하지만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와 협력해 영지를 보전하는

소극책을 취합니다.

 

도요토미 정권 당시에는 당주인 모리 데루모토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음가는 대 다이묘의 지위를

유지하지만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세력과 맞붙은

세키가하라 전투 등에서 대립하는 서군의 대표로

나섰다가 120만 석의 영지 중 대부분을 삭감당하고

스오-나가토(이후 조슈번) 38만 석으로 강등됩니다.

 

이 가문의 원한은 19세기 중반에 막부 토벌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조소가베 모토치카

 

혼슈 아래의 섬 시코쿠의 패자로서 도사 번을

중심으로 평생을 바친 전투와 모략 끝에 시코쿠를

평정하지만 마침 전국통일을 위해 세력을 뻗은

히데요시에 의해 굴복하고 도사 일국(24만 석)만을

유지하게 된 비운의 영웅입니다.

 

출발이 너무 늦은 게 아쉬운 인물이고 그의 사후

조소가베 가는 배를 잘못 타서 영지를 잃고 멸망합니다.



 

시마즈 요시히로

 

규슈 남부의 유서깊은 수호 다이묘인 시마즈 가의

당시 당주입니다.

 

시마즈 가는 오랜 세월 남 규슈의 사쓰마 번 등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해왔으나 기본적으로 지역

다이묘 수준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센고쿠 시대 말엽에 규슈 석권을 노리고

당시 기타큐슈의 강력한 세력이던 오토모 가와

류소지 가 등을 밀어붙여 거의 규슈를 통일할

기세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천하통일을 위해 진출한 도요토미

세력과 이에 합세한 모리 가 등에 의해 역부족으로

밀려나 기존 3개 구니만 차지하게 됩니다.(56만 석)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했으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영지를 삭감당하지 않고 에도

막부 시기 내내 강력한 도자마 다이묘로 남게 되며,

막부 토벌 운동 당시에도 조슈 번과 함께 선봉에

서게 됩니다. 시골동네이지만 강군으로 일본 전역에

유명한 무용을 떨친 군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

 

북 규슈에서 주가인 류소지 가를 넘어서 일국을

차지한 나베시마 가의 개조입니다.

 

35만 석의 영토를 유지하고 도쿠가와 편에 붙어

막부 말까지 번을 유지합니다.



 

우키다 나오이에

 

우키다 히데이에의 부친으로, 모리 세력권에 있었지만

말년에 오다 가에 붙습니다.

 

비젠을 중심으로 권모술수를 통해 57만 석의 영지를

남기지만 아들 우키다 히데이에가 서군의 주요인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뒤 가문은 무너집니다.



 

아사이 나가마사

 

북부 오미의 신흥 다이묘 아사이 가의 마지막 당주로

아사이 가는 원래 주군인 명가 교고쿠 가문을 밀어낸

하극상의 다이묘 가입니다.

 

신흥세력으로 강군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작은 영지에도

불구하고 센고쿠 시대 말에 많이 오르내리는 명가입니다.

(영지는 39만 석)

 

아사이 나가마사는 드라마틱한 최후와 함께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의 남편으로도 유명하지요.

 

또한 아사이 가는 오다 가에 패해 멸망하지만 오이치가

낳은 세 딸은 중국 현대사에서 송씨네 집 세 딸에 못지

않은 역사의 주인공이 됩니다.

 

* 큰 딸은 후일 알려진 것처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첩으로 들어가 히데요리를 낳은 비운의 여인 요도도노로,

둘째 딸은 교고쿠 가의 며느리로 들어가 다이묘의

혈통을 이어가며, 셋째 딸은 이혼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적자 히데타다와 혼인한 오에요입니다.



 

아사쿠라 요시카게

 

혼슈 북부 에치젠의 마지막 당주로서 크게 뛰어난

인물은 아니지만 오다 노부나가의 천하패권을

초창기부터 꾸준히 방해하면서 대 오다 동맹의

중요한 일각을 차지했던 인물입니다.

 

에치젠이 교토와 가깝고 세력이 작지 않았기

때문에(69만 ~ 75만 석) 노부나가와는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그 이전에 가문끼리

역사적으로 원한이 좀 있긴 했습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모두와 관련이 있는

센고쿠 시대의 거물 다이묘입니다.

 

미카와-도토미-스루가 3국을 차지하고

오와리의 상당부분을 영유하는 등 100만 석이

넘는 영지를 갖고 있었으며 대표적인 수호대명에서

전국대명으로 변신한 가문이기도 합니다.

 

이마가와 가법 등으로 인접한 다케다 가나 호죠

가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당시 최대 세력으로

교토 상경에 나섰으나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열세인 오다 노부나가의 기습을 받고 전사해

이후 이마가와 가는 도쿠가와 가와 다케다 가에

의해 양분되어 몰락합니다.



 

사이토 도산

 

센고쿠 시대 대표적인 하극상 다이묘로서

기름행상에서 출발해 당시 큰 구니였던 미노

전역을 장악했으며 사위인 오다 노부나가에게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기도 합니다.

 

효웅으로 악명이 높아 ‘살무사’란 별명으로

불렸지만 많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당대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 시바 료타로의 <나라 훔친

이야기> 전반부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후일 아들 요시타츠의 모반으로 전장에서

패사하는 비운을 겪기도 합니다.

 

외동딸은 노부나가의 부인이 되어 후일 혼노지의

변 당시 함께 전사합니다.



 

우에스기 겐신

 

에치고의 용, 군신으로 불리며 <하늘과 땅과>

등 일본의 수많은 영화, 드라마, 소설, 만화 등에

등장하는 당대의 용장입니다.

 

옆 나라의 다케다 신겐과는 일생의 라이벌로

가와나카지마 전투 등 수많은 전투로 평생을

적대하면서도 기묘한 정을 쌓은 인물이지요.

 

에치고 본령은 55만 석 정도였지만 남방의

호죠 씨와 관동의 패권을 놓고 다투고 인접국인

노토, 엣츄 등을 영유하는 등 겐신 시절에 크게

세력을 떨쳤고 다케다 가가 기울어진 뒤에는

오다 가 대항 동맹의 주축이 되기도 했으나

우에스기 겐신이 뇌출혈로 급사하면서 이후에는

천하쟁패에 나서지 않고 도요토미 정권 성립에

동의하면서 다이로의 지위를 유지합니다.

 

도요토미 정권 후반에 에치고를 떠나 아이즈와

요네자와 등 보다 동쪽 변경으로 전봉됩니다.

 

후계자인 우에스기 가케가쓰가 반 도쿠가와

동맹에 가담해 120만 석의 영지를 빼앗기고

30만 석만 남지만 멸문은 당하지 않고 도자마

다이묘로서 명맥을 유지합니다.



 

다케다 신겐

 

‘풍림화산’으로 유명하며 구로자와 아키라의

<카게무샤> 등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시바 료타로나 요시카와 에이지의 문학 속에서도

가장 웅대한 존재로 등장하며 오다 노부나가의

패권을 위해 가장 넘어서야 할 존재이기도 했지요.

 

부친을 밀어내고 가이의 전권을 움켜쥔 뒤

당시 최강의 세력들이던 에치고의 우에스기 가,

간토의 호죠 가, 도카이도의 이마가와 가 등과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였으며, 특히 우에스기 겐신과

수 차례에 걸쳐 벌인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유명한

사건입니다.

 

오다 가와의 동맹을 깨고 교토로의 상경을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대파하고 영지를 크게 늘리지만

신겐은 일설에 의하면 저격, 다른 설에 의하면 위암

등의 질병으로 53세를 일기로 사망합니다.

 

후계자인 가쓰요리는 부친의 뒤를 이어 여러 차례

출병해 도쿠가와 가문과 일진일토의 공방전을 벌이지만

이 시기부터 천하쟁패보다는 영지 확장 중심의 면모를

보입니다.

 

그러나 가쓰요리는 부친인 신겐의 신중한 전쟁준비와

달리 무력 중심으로 일관하다가 저 유명한 나가시노

전투에서 일격을 얻어맞고 이후에 중신들의 국력정비

진언을 외면한 채 계속 전쟁에 몰입하다가 주변국들의

일제 공격에 결국 패망해 오랜 겐지 명가는 멸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가신들은 도쿠가와 가문에 수용되어

<갑양군감> 등 군사적으로 많은 공헌을 했으며 도쿠가와

가문의 군제도는 다케다 가문의 그것을 따르게 됩니다.

 

센고쿠 다이묘로서는 오다-도요토미-도쿠가와를 빼면

가장 유명하고 가장 강력한 포스를 뿜은 인물이지요.

 

전성기 영지는 120만 석, 오히려 가쓰요리가 침략

일변도로 날뛸 때 영지가 더 넓긴 했지만 아우라는

비길 수가 없었습니다.



 

호죠 우지야스

 

선조 호죠 소운의 뒤를 이어 관동의 강자로

군림하던 호죠 가의 전성기 당주로 다케다, 우에스기,

이마가와 등 전통의 강자들과 겨루며 근거지를 굳건히

다진 인물입니다. 호죠 소운의 후손들 중 유일하게

개조인 소운의 포스에 비길만한 인물입니다.

 

이즈, 사가미, 무사시 일대를 기반으로 북방의

우에스기 겐신과, 서방의 이마가와 및 다케다 가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치면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착실하게 세력을 유지했습니다.

 

영지는 140만 석 수준의 전성기 때 영역을 가졌으나

다케다와 우에스기의 멸망 이후 천하패권에 대한

무지함으로 인해 그 후손들은 가문을 말아먹게 됩니다.

 



다테 마사무네

 

‘독안룡’으로 유명한 북부 오슈 일대의 패자입니다.

 

전국시대 말기에 골육항쟁을 거쳐 다이묘의 지위를

차지하지만 너무 늦게 태어나 이미 천하는 통일되고

계속 그 틈바구니 속에서 영지 확대에 골몰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충실한 동맹으로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우에스기 가의 뒤를 위협한 수훈을 세우고

이에야스의 아들인 다다테루를 사위로 맞아 유력한

도자마 다이묘가 됩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그의 야심을 경계하고 있었지요.

 

에도 막부 초기에 과거 우에스기 가의 영토를 일부

분봉받고 야매로 개척사업에 힘써 공식적인 봉토는

62만 석의 센다이 번주가 되지만 실제 세력은 100만

석으로 도자마 다이묘들 중 가장 큰 세력의 하나가

됩니다.



 

마에다 도시이에

 

역시 NHK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

후일 가가-노토 지역 100만 석의 마에다 가를

연 개조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일생의 친우로 - 비록

신분은 서로 뒤바뀌지만, 초기엔 히데요시가 감히

말도 못 붙일 상급 사무라이 가문의 후계자로,

이후에는 오히려 히데요시보다 출세에서 뒤처지고

나중에는 충실한 수하가 되는 인물입니다.

 

걸출한 인물은 아니지만 성실하고 우직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히데요시 말년에 도쿠가와 가를

견제하기 위해 꾸준히 마에다 가를 밀어주지만

도시이에 사후 마에다 가는 그 역할을 다하지는

못하고 도쿠가와 가에 미온적으로 붙어 영지를

보전하는 데 그칩니다.

 

에도 막부 시대 손꼽히는 대 다이묘로서 지위를

유지했으며 마에다 도시이에의 부인 오마츠나

도시이에의 사촌동생의 일화 등 활약상에 비해

소소한 야사들로 유명한 가문입니다.

 

마쓰나가 단조

 

오다 노부나가의 교토 상경 이전 교토 일대를

주름잡던 다이묘 중 한 명으로 권모술수로

매우 유명한 인물입니다. 쇼군을 암살하는 데

앞장서는 등 마키아벨리적 인물로 이후 오다 가에

투항해 중용되지만 대 오다 동맹 후반에 끝내

배반하고 근거지에서 농성하다 자결하는 인물로

시바 료타로의 <나라 훔친 이야기> 등에서 젊을

적 일화가 소개되기도 합니다.

 

농성 준비를 하느라 토란으로 다다미를 깔고

흙벽 속에 말린 오징어를 저장하는 등 기발한

아이템으로 일본의 전투식량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미요시 3인방

 

마쓰나가 단조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의

교토 상경 당시 밀려난 당시 유력가문으로

선대에 일본 중부일대에서 패권자의 위치를

누리기도 했지만 노부나가의 위광 앞에 금방

군소세력으로 사그라든 세력입니다.



 

시바타 가쓰이에

 

노부나가의 필두 가로로 주로 북륙에서 활약했고

에치젠과 가가, 노토, 엣추 등 북방의 패자로서

오다 노부나가 사후에 180만 석의 대영지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외교나 정략에는 둔감했고 이로 인해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패해 멸망합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히데요시의 시동 출신으로 인척 관계입니다.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하나로 도요토미

정권 후반에는 오와리의 다이묘로서 24만 석의

기요스 성주가 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편 선봉으로 활약한 뒤에는 50만 석의

대영주가 되지만 도요토미 가에 대한 온정적

태도로 의심을 받아 말년에 가이에키(영지를

몰수당하는 처벌)를 당해 몰락하게 됩니다.



 

가토 기요마사

 

역시 히데요시의 시동이자 인척입니다.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한 명으로 임진왜란

당시 2군을 맡았으며 규슈의 히고 반국 25만 석의

다이묘로 히데요시 정권 치하를 보냈습니다.

 

후일 도쿠가와에 붙어 히고 일국 55만 석을

차지하지만 여전히 친 도요토미 입장을 유지하다

이를 우려한 에도 막부에 의해 아들 다다히로

대에 가이에키를 당해 몰락합니다.

 

호소카와 유사이-다다오키

 

명문 호소카와 가를 중흥시킨 부자들입니다.

 

유사이는 막부의 막신으로 있다가 오다 가에

귀순해 다이묘가 되었으며 당대의 문인이자

무장으로 문무겸비의 대명사로 불렸습니다.

 

아들 다다오키 역시 문예에 뛰어난 인물인

동시에 무장이었으며 부인 가리샤에 대한

집착으로도 유명한 인물이지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동군에 붙어 42만 석의

대영지를 얻게 되며 막부 내내 영토를 유지합니다.



 

구로다 조스이 - 나가마사

 

히로시마의 다이묘가 된 구로다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들입니다.

 

조스이는 젊은 시절 구로다 간베에로 불리며

히데요시의 패업 시절 참모였으나 천하통일 후

팽 까지는 아니지만 그의 재능을 두려워한 나머지

10여 만 석의 적은 영지만 수여받습니다.

 

이후 아들 나가마사는 적극적으로 도쿠가와에

접근해 많은 공헌을 세워 52만 석의 대영주로

올라서게 됩니다.

 

사나다 마사유키 - 유키무라

 

실제 영지 규모나 세력보다는 이후 문학 등에

의해 널리 알려진 인물들로 마사유키가 아버지,

유키무라가 아들입니다.

 

신슈(시나노) 소 다이묘로서 실제 세력은 5-6만

석에 불과했지만 그 모략과 기량이 범상치 않은

인물인 사나다 마사유키는 다케다 신겐의 시동

출신으로 신겐에게서 전수받은 기략으로 격동의

관동 일대에서 독립세력을 유지했고 오다 노부나가

사후에 고슈-신슈를 석권한 도쿠가와 세력을

여러 번 국지전에서 물리치곤 했었습니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3만8천 대군을 불과 2천 명의 군세로 저지하는

무공을 세우지만 전쟁의 패배로 마사유키는 근신에

처해지고 죽습니다.

 

유키무라 역시 유배되어 있었으나 도요토미 가의

최후를 장식한 오사카 성 전투 당시 참전해 용맹을

떨칩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전사하며 후일 여러

작품에서 그의 무용담 때문에 실제 세력에 비해

유명한 인물이 됩니다.



 

센고쿠 시대는 불과 20여 만 제곱킬로미터 영역에

66국이라는 터무니없는 구획이 그어지고 300명에

가까운 다이묘들이 할거하던 시기라 대충 자주

언급되는 인물들만 거론해 봤습니다.

 

주로 노부나가-히데요시-이에야스 활약 시기에

중복되던 인물들로 읊어봤고 규슈나 오슈 일대

다이묘들은 대부분 건너뛰었습니다.

by 붉은10월 | 2010/02/08 14:06 | 뒤죽박죽 밀리잡학 | 트랙백 | 덧글(34)
[심심파적] 일본 전국시대 다이묘 규모 계산공식



일본 전국시대 다이묘의 세력규모

 

여러 일본문학 - 대망 혹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류의 -

이나 게임 <신장의 야망> 등을 통해 우리 역사보다

오히려 일부분이지만 더 익숙한 부분이 이른바 일본

전국 - 센고쿠 - 시대입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대표되는 3명의 영웅에 의해 이 기나긴 혼란의 시대는

정리가 되었고 이후 에도 막부 - 바쿠후 -를 거쳐 메이지

천황 시절 유신으로 근대 일본의 기틀을 닦았지요.

 

수많은 문학과 영화, 게임들 속에 묘사된 것을 보면

남북한 합친 것 만한 크기에 - 당시에는 북해도, 즉

홋카이도는 미개척 상태였으니까요 - 무려 66개 국

(지금은 약간 차이는 있지만 ‘ ~ 현 ’ 이라 불리는

행정구역이 그 당시에는 독립국으로 표현되었습니다)이

그 좁은 땅덩어리 안에 가득 존재했었습니다.

 

다이묘는 일본 특유의 막부 체제 - 무인정권 - 에서

장군 - 쇼군, 원래 풀어쓰면 ‘정이대장군’, 즉 오랑캐를

정벌하는 장군이란 뜻입니다 - 에게 직접 1만 석 이상의

수확이 나오는 영지를 수여받은 영주를 뜻합니다.

 

장군에게서 직접 수여받았지만 1만 석 이하의 석고를

가진 무사는 <하타모토>라 불립니다. 다이묘와 하타모토를

포함해 장군에게 직접 영지를 받고 명령을 받는 사무라이

계층을 넓게는 <지키산>이라고 하지요. 쉽게 이야기하면

‘직속’이란 뜻입니다.

 

센고쿠 시대 전성기 때 일본에는 200 ~ 300명이 넘는

다이묘가 존재했습니다.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는 이전

시기와는 다르게 ‘센고쿠 다이묘’, 즉 <전국대명>이라

불렸는데 이는 과거 장군의 임명에 의한 다이묘가 아니라

다양한 출신성분을 가진 풍운아들이 자기 힘으로 일국을

찬탈해 다이묘가 되거나 하극상이 횡횡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 한 지역, 혹은 여러 지역의 군무를 맡은 다이묘를

수호대명이라 불렀는데 이 수호대명과 대조해서 전국대명

표현을 많이 사용하곤 합니다.

 

수호대명 중에서도 체제를 정비하면서 전국대명화 한

다이묘가 적지 않았습니다. 보통 역사가 좀 오래되고

나름대로 가문의 격을 따지는 다이묘가 대개 수호대명

출신인 경우가 많습니다.

 

규슈 남단 사쓰마의 시마즈 씨나 분고의 오토모 씨,

도카이도 지방의 이마가와 씨 등이 대표적인 수호대명

출신의 전국대명들입니다.

 

반면에 하극상으로 유명한 전국대명들은 - 사실

하극상이 무수하게 많았습니다만 - 기름장수 출신으로

미노 일국을 차지한 ‘살무사’ 사이토 도산과 간토 일대를

여러 대에 걸쳐 장악했던 후 호조 씨의 개조, 호조 소운

등이 유명합니다.

 

전국 다이묘로서 이후 도요토미, 도쿠가와 시대까지

살펴보면 영지와 세력의 규모는 실로 다양했습니다.

 

1만 석 조금 넘는 소 다이묘도 많았던 반면,

막부에 대해선 ‘바이신’, 즉 다이묘의 신하로서 한 단계

떨어져 있는 신분이건만 유력한 대 다이묘 아래의 가로

- 신하 중 고위급으로 정무에 있어 보좌 혹은 대리격인 -

중에선 웬만한 다이묘보다 더 넓은 영지를 가진 이들도

몇몇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일본 센고쿠 시대의 경우 이를 이해하는 데에는

쉬운 척도가 하나 존재합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농업사회였던 시절이다 보니 토지,

즉 봉토의 규모가 다이묘의 세력을 비례해서 보기에

가장 무난합니다.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 이후 상업과

무역에 신경을 쓴 다이묘들이 늘어가긴 했지만 역시

대부분의 다이묘들은 농업생산에 목을 매는 처지이다

보니 거의 비례한다고 보시면 될 정도입니다.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당시에 일본의 병졸 급 사무라이들은 하루에 2끼

혹은 3끼를 먹고 살았습니다. 1끼 식사 정량은 지금

기준으로 봐서는 형편없는 수준이었지요.

 

2홉 정도의 쌀 위주의 곡물과 약간의 소찬

- 일본라멘집 가면 나오는 야채절임 수준 -

및 간장, 된장, 소금 정도로 끼니를 때웠습니다.

 

아직 화폐경제가 활성화되지 않은 시기였고

별도의 지출도 크지 않던 시절, 즉 밥만 먹으면

되는 시기이다 보니 대규모의 군대를 운용해도

경비는 지금 기준으로 봐서는 의외다 싶을 만큼

적게 들었던 때이지요.

 

200석 규모의 봉토를 다이묘에게서 수여받은

사무라이는 5명 전후의 히라사무라이 - 신분이

낮은 사무라이 -를 거느렸다고 합니다.

 

1만 석 규모의 영지를 가진 소 다이묘는

250명의 사무라이를 일반적으로 거느렸습니다.

 

이 기준으로 배수로 계산하면 대충 각 다이묘의

영지들에서 나오는 쌀 생산량 - 석고 -을 알고

있다면 운용 가능한 군세가 계산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종 당시 이후 정권의

주요 의사결정 합의를 할 단위로 선정한 <다이로>

로 임명된 5명의 대 다이묘들의 석고를 보겠습니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 240만 ~ 256만 석

- 모리 데루모토 / 120만 ~ 121만 석

- 우에스기 가케가쓰 / 120만 석

- 마에다 도시이에 / 81만 ~ 102만 석

- 우키다 히데이에 / 57만 석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만 석 당 250명으로 계산하면

6만 ~ 6만4천 명의 군대를 독자적으로 운용할 수 있고,

모리 데루모토와 우에스기 가케가쓰는 3만 명 정도를

동원할 수 있습니다.

 

마에다 도시이에는 2만에서 2만5천 명을,

우키다 히데이에는 1만5천 명 정도를 움직입니다.

 

이 정도 수준이면 당시 일본에서 몇째 가는 수준의

대영주입니다.

 

그러나 이 당시는 전국시대 초기의 이합집산이

정리되어가던 시점이므로 새로 영지를 수여받은

소 다이묘들이 생겨나는 동시에 폐문, 멸문을

통해 중소 다이묘는 물론 일부 대 다이묘들도

몰락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좀 더 앞으로 시대를 옮겨 보겠습니다.

 

아직 오다 노부나가가 햇병아리 소 다이묘이던

시절 인접국의 대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당시 일본 최대의 대군을 이끌고 수도인 교토로

상경하던 것을 맞아 전쟁을 벌이던 시절에는

이후 센고쿠 시대 말기의 각축 속에서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대립하면서 세력을 모으던 시기에

비해 대 다이묘들의 세력규모가 적었습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3개 국 - 구니 -을

영유하고(미카와, 도토미, 스루가), 오다 씨의

텃밭인 오와리 지역의 상당부분도 점유하고

있던 시기로 이 당시 일본 전국에서 동원 가능한

규모는 가장 많았다고 인정받을 때입니다.

 

최대 동원력이 4만 명에 가까웠다고 하지만

실제로 출정한 병력은 2만5천 명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항하는 오다 가의 병력은 다 합쳐서

5천 명에 불과했습니다만...

 

그래도 100만 석이 넘는 규모의 군세이지요.

 

이 때 이마가와 씨의 군세의 웅장함을 묘사하면서

다른 다이묘들의 동원능력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오다는 5천 명, 호죠는 1만여 명, 다케다는 1만

2천 명 정도로 표현됩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격파하고 오와리 1국을 통일(50만 석)합니다.

 

이때서야 오다 노부나가의 병력은 1만2천 명

정도 동원이 가능해집니다.

 

이후 인접국인 미노를 5년 넘게 공략해서

내분 등을 이용해 장악합니다.

 

미노는 꽤 큰 구니였기 때문에 75만 석이

넘는 석고를 가지고 있던 걸로 알려집니다.

 

이 때 오다 노부나가는 2만5천에서 3만이

넘는 동원능력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후 아시카가(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장군인 요시아키의 권유로 교토를 공략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교토로 가는 길목의

오미와 이세 등 지역을 공략해 교토를

차지한 직후에는 240만 석의 영지와 6만

명의 병력을 갖추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서쪽의 모리 가문 외에는

단일 규모로 가장 큰 세력이 됩니다.

 

이 당시 이전부터 오다 노부나가의 동맹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미카와와 도토미 2개

구니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 때 영지 규모는

56만 ~ 60만 석 정도가 됩니다.

 

자연히 동원능력은 1만2천 ~ 1만5천 정도가

되었겠지요. 여기에 다케다 가문이 차지한

스루가를 합치면 이마가와 가문의 영지가

됩니다.

 

이후 노부나가의 영지가 당시 일본 중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전성기에는

526만 석의 영지를 갖게 됩니다.

13 ~ 14만 명 이상의 군대를 보유할 능력을

갖게 된 것이죠.

 

이 때부터 오다 노부나가의 군단장들이

각자 영지를 분봉받아 다이묘가 됩니다.

 

제 1가로였던 시바타 가쓰이에는 북부 산간

지방인 호쿠리쿠 일대에서 에치젠을 수여받아

75만 석을, 후일 혼노지의 난을 일으킨 주역

아케치 미츠히데와 천하를 석권하게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각각 50여만 석의

영지를 갖게 됩니다.

 

여기에 니와 나가히데와 다키가와 가즈마스를

합친 5명의 군단장이 각각 중급 이상의 다이묘가

된 셈이지요.

 

한편 센고쿠 시대 오다 가문의 천하패권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고신 지역 - 고슈와 신슈,

혹은 가이와 시나노 일대 - 의 다케다 신겐은

120만 석의 영지와 3만 명의 상비군을 가졌습니다.

(이 당시 다케다 가문의 세력은 가이와 시나노를

합쳐 80만 석, 도쿠가와 씨에게서 빼앗은 미카와,

도토미 등과 이전에 이마가와 씨에게서 탈취한

스루가를 합쳐 40만 석 전후입니다)

 

세력으로 봐서는 오다 노부나가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지요. 그러나 다케다 신겐의

군대가 워낙 강군으로 유명했었고, 신겐의 지략이

뛰어난 데다 오다 가문처럼 돌출된 세력의 강세에

거부감을 느낀 여러 세력이 공동전선을 치고 있었기에

적은 세력으로도 동등한 무게감을 갖게 된 것이었죠.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전후를 기준으로 당시 유력 다이묘와

그 영지의 석고와 군세를 비례해서 소개드리자면,

 

도쿠가와 가 / 250여 만 석 / 7만 이상

우에스기 가 / 120만 석 / 3만

모리 가 / 120만 석 / 3만

마에다 가 / 102만 석 / 2만 이상

우키다 가 / 57만 석 / 1만7천

고바야카와 가 / 52만 석 / 1만5천

시마즈 가 / 60만 석 / 1만5천

조소가베 가 / 24만 석 / 6천6백

나베시마 가 / 35만 석 / 7천 이상

다테 가 / 62만 석(공식), 100만 석(비공식) / 2만5천

후쿠시마 가 / 24만 석 / 6천

가토 가 / 25만 석 / 6천

고니시 가 / 24만 석 / 6천 등이 됩니다.

 

이 정도면 중대형 다이묘라 할 수 있겠지요.

 

반면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주역이라 할 이시다 미쓰나리의 경우 19만 석의

규모에 불과합니다. 원래대로라면 격이 안 맞아 상대를

할 수도 없는 체급끼리 맞붙은 셈이지요.

 

NHK 사극으로 유명한 <공명의 갈림길>에 등장하는

야마우치 가즈토요의 경우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에

6만 석의 신분인 중소 다이묘였습니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도사 1국을 수여받아

일약 24만 석의 영지를 갖게 됩니다. 400% 주식대박

난 셈이지요. 대신에 조소카베 가문이 영지를 빼앗기게

- 가이에키 - 됩니다. 영지를 잃은 다이묘의 신하인

사무라이들은 이럴 경우 낭인 - 로닌 - 이 되어 자신을

고용해 먹여살릴 새로운 다이묘를 찾아 나서거나 농사를

지으며 토착화된 향사가 되어야 합니다.

 

- 도사의 경우 조소카베 가문의 향사들 대부분은

고향에 눌러앉아 천대를 받게 되고 이후 토막 운동

(막부를 타도하려는 운동)에 대대적으로 참여하게

되는데 장장 300년에 가까운 원한관계였지요 -

 

<공명의 갈림길>에 등장하는 야마우치 가즈토요의

친구들 - 호리오 다다우지, 나카무라 가즈우지 - 도

12만 석, 17만5천 석 정도의 영지를 가졌었습니다.

 

역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출세한 인물로 주종관계를

7번 바꾼 풍운아 도도 다카토라의 경우도 8만 석에서

32만 석으로 대박 출세를 하게 됩니다.

 

역시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가토 기요마사 등 도요토미

계열이지만 도쿠가와 편을 든 이들에게도 봉토의 확대가

이뤄지지요. 이들 둘은 각각 50만 석 이상의 신분이

됩니다. 동원능력도 두 배 이상 늘어나 각각 1만 단위

이상의 군세를 갖추게 되지요.

 

구로다 나가마사의 경우 10여 만 석에서 52만 3천 석으로

역시 영지가 어마어마하게 확장됩니다.

 

하지만 일본 영토가 늘어난 게 아닌 만큼 이런

대박 히트의 뒤안길에는 줄을 잘못 서서 패가망신한

다이묘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습니다.

 

100년 가깝게 일본 서부 최대의 세력을 가졌던

모리 가의 경우 120만 석에서 스오, 나가토 2국의

37, 8만 석으로 삭감이 됩니다.

 

3만 명의 직속 사무라이를 거느린 모리 가는 하지만

대부분의 가신들을 그대로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냥 내보내면 생계 문제 해결이 안 되니까요.

 

그러나 영지는 대폭 삭감되었으니 자연히 긴축재정에

들어갈 수 밖 에 없었습니다. 고작해야 8천 명 정도

먹여 살릴 영지로 3만 명을 움켜쥐고 가게 되었으니

에도 막부 시절 내내 모리 가는 재정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후에 모리 가의 영지인 스오, 나가토 2국은

통합해서 조슈번으로 불렸습니다.

 

바로 토막 운동의 양대 주역인 사쓰마와 조슈의 그

조슈 번이고 제국주의 시기 일본군부 내 최대파벌인

조슈번 출신들의 기원이 300년 가까이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궁핍으로 내몰린 모리 가의 사무라이

세력인 것입니다.

 

우에스기 가의 경우도 드넓은 아이즈 120만 석에서

요네자와 30만 석으로 내몰립니다. 1/4로 영지가

줄어든 셈입니다.

 

삭감 이전 우에스기 가의 필두가로인 나오에 가네쓰구의

개인 영지가 30만 석이었으니 주종이 참 머쓱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북 오지라 할 수 있는 오슈 지역의 ‘독안룡’ 다테

마사무네의 경우 지금의 센다이 지방을 영지로 갖고

있었는데 야심에 가득 찬 이 다이묘는 감시의 눈이

상대적으로 미치기 힘든 변방지역에 있는 걸 이용해

토지개간을 장려해 봉토로 받은 62만 석에 덧붙여

실제로는 100만 석이 넘는 세력을 숨기고 있었다

하지요. 하지만 이런 꼼수는 막부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던 변경지역의 다이묘들이나 가능한 방법이었고

비슷한 사례로 세력 확대를 위해 오키나와를 침략해

정복한 남쪽규슈 지방의 시마즈 가문의 활동이 있지요.

 

이 시기에 독립국 오키나와는 일본의 속국이 됩니다만,

정확하게는 시마즈 가문의 속국이 된 것입니다.

 

시마즈 가문의 동원력이 1만이 넘었으니 일개 지방

영주가 독립된 주권국을 공략하는 게 가능했지요.

 

다시 센고쿠 시대 최대의 영웅들을 돌아보자면,

오다 노부나가는 전성기에 500만 석이 넘는 영지를

가졌습니다만 이 시기부터 부하 장수들을 다이묘로

만들어 분봉을 했기 때문에 실제 직할령은 그만큼은

아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관백 - 간파쿠 - 으로 집권하던

시절 직할령을 220만 석 정도 갖고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직할령은 적지만 대신에 당시 전성기를

누렸던 일본 내 금은광산을 직속으로 보유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적은 영지를 보완할 수 있었지요.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후 에도 막부 역시 천령이란

이름으로 400만 석 전후의 직할 영지를 갖고 있었고

큰 광산도 직속으로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센고쿠 시대 중후반의 일본 전체 석고는 1,000만 석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냥 봐도 흥미로운 센고쿠 시대 이야기이지만 이렇게

객관적인 계산 수치로 보면 더 쉽게 설명이 될까 싶어

그냥 자료 하나 안 찾아보고 대충대충 휘갈겨봅니다.

by 붉은10월 | 2010/02/05 16:47 | 뒤죽박죽 밀리잡학 | 트랙백 | 덧글(4)
[밀리잡학] 베네주엘라 군사력 현황(4)

공군




차베스 대통령이 집권하기 이전 베네주엘라

공군력 주력은 미국 제 F-16A/B 전투기 21대와

프랑스 제 미라주 50 15대, 캐나다 제 F-5

전투기 21대, OV-10E 경공격기 28대를 운용하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제 SU-30MK2 전투기 24대를

보유하기 시작하면서(미라주 50은 대체 후 퇴역)

주변국 공군력을 압도하는 전력으로 급성장했다.




* SU-30 플랭커는 SU-27을 미 공군의 F-15E

스트라이크 이글에 견줄 만한 다목적 전투기를

목표로 현대화한 기체로 장거리 타격능력을

추가한 기체이다.

최대 도입국은 중국으로 100대 이상 운용하고

있으며 무단복사판으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J-11 양산을 포함하면 최다 보유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전망이다.




중국에 필적하는 보유대수를 가진 또 다른

국가는 인도로 총 180대를 보유하게 될

전망이다. 공식적으로 도입하는 수량으로는

최대치이다.

이 외에도 알제리,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에서도

저렴한 가격과 다용도성을 무기로 도입한 바

있다.

베네주엘라 도입 사양은 중국 해군항공대

수출형과 유사한 사양으로 공대함 미사일을

운용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대속도는 마하 2.35, 무장탑재량은 최대

8톤까지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정무장은 30mm GSH-30-1 기관포

1문이며 단거리 전용 AA-11 아처와

중거리용 AA-12 애더(암람스키) 공대공미사일,

KH-31 대 레이더미사일, KH-29 공대지미사일,

KH-59 공대함미사일 외 각종 범용/레이저유도

폭탄 등을 운용할 수 있다.

또한 중등훈련기로 경공격기로 운용 가능한

성능의 중국 제 K-8 18대를 발주하여 도입을

기다리고 있다.




* K-8은 현재 개발국인 중국(200대)과 파키스탄

(100대)에서 양산 배치 중이며 수출형은 이집트

(80대), 버마(12대), 스리랑카(6대), 잠비아(8대),

짐바브웨(12대) 등에서 도입된 바 있다.

기관포와 폭탄, 로켓탄을 운용할 수 있으며

최고속력은 마하 0.8 수준이다.

수송기 전력으로는 미국 제 C-130H 6대와

보잉 707, EMB-312 등을 보유하고 있다.

공군 소속 헬기 전력으로는 AS-332와 AS-532

16대를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총 평

베네주엘라의 군사력은 과도한 군비를 갖추고 있는

우리 시각으로 보기엔 삼류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주변국들의 군비도 그리 대단하지 않기 때문에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러시아의 신형 무기 도입에

열을 올리는 베네주엘라의 행보는 위협이 되기에

충분한 수준이다.




이후 미국의 군사원조로 군비를 증강하는 콜롬비아와

같은 남미대륙의 패권을 놓고 은근히 미국과 결탁해

이 신흥강국을 견제하려는 브라질, 전통적인 친서구

정책을 견지하면서 반대급부로 군비를 지원받는 칠레

등 남미대륙의 국제정세를 주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베네주엘라의 군비 도입이 군사독재자들의

전형처럼 막무가내는 아닐뿐더러 - 차베스 대통령은

상당한 재원을 주변 빈국 원조와 자국 내 빈곤층

생활 향상 프로그램에 투입하고 있다 - 자위 수준을

넘어서 외국을 침략할 의도로 증강한다고 보기엔

여러 제약이 많기 때문에 실제로 아시아의 군사대국들

군비 증강에 비해선 우습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생각을 바꿔서, 한국과 중국, 인도, 일본

등 아시아 군사대국의 군비증강이란 것이 보다 더

나은 국민복지와 주변국들과의 우호 증진 대신에

천문학적 재원을 쏟아 붓는 데 익숙해 있는 우리

스스로의 눈높이를 다르게 비춰보는 계기로 삼는

것도 한번쯤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by 붉은10월 | 2010/02/02 01:12 | 뒤죽박죽 밀리잡학 | 트랙백 | 덧글(4)
[밀리잡학] 베네주엘라 군사력 현황(3)

해군

18,300명의 병력으로 해병대 7,800명을 포함하고 있다.

주 전력은 6척의 이탈리아 제 루포 급 호위함과

독일 제 209형 잠수함 2척이며 3척의 미사일 고속정을

추가로 보유하고 있다.




* 루포 LUPO 급은 소형 경량 고속 다목적 프리깃함으로

이탈리아에서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이탈리아,

페루 및 베네수엘라 해군용으로 건조되었다.

만재배수량은 2,500톤이며 승조원은 152명이다.

무장은 8기의 오토매트 대함미사일과

8기의 Aspide/Sea Sparrow 대공미사일,

1문의 127mm 오토매라라 함포, 2문의 40mm 다용도

기관포 및 2기의 3연장 323mm 어뢰발사관을 장비한다.

함미 격납고에는 1대의 AB-212 ASW 헬기를 운용한다.




* 베네주엘라의 209형은 209-1300톤 급으로서

1976/1977년에 취역해 30년이 넘은 노후함이다.

그러나 1980/1984년에 1차로 현대화 개량을 실시하고,

1990/1995년에 2차로 추진기관과 소나 및 전투시스템,

잠망경에 대한 개량을 실시한 바 있다.

통상적인 남미 지역의 잠수함 운용 상태에 비해

상당히 지속적인 성능 개량이 실시되었다.

안전잠항심도 250미터, 최고속력 21.5노트,

승조원 33명, 어뢰발사관 533mm 8문으로

탑재어뢰는 14발이다.

그 외 전력은 연안경비함 / 경비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러시아 제 킬로 급 잠수함 9척을 도입 진행하고 있어

이후 도입 완료 후 대서양과 카리브 해 사이의 위협

요소로 미국의 신경을 곤두세울 것으로 보인다.




* 킬로 급은 후기형인 636형으로 알려져 있으며

3천 톤이 넘는 대형 디젤 잠수함이다.

여전히 구소련 / 러시아 제 잠수함은 서방의

최신 디젤 잠수함에 비해 조잡하고 비인간적인

설계 및 운용개념으로 악평을 받고 있지만

킬로 급은 상당히 소음도 감소되어 있고 기본

성능 면에서 서방의 디젤 잠수함과 충분히 대적할

수 있음은 물론, 러시아 특유의 웨이크 호밍 어뢰

(수상함이 꼬리 부분에서 내는 파문을 추적하는

어뢰)나 신예 초음속 대함 미사일과 결합되면

카리브 해에서 미 해군의 활동에 심각한 위협이

될 성능을 갖고 있다.

최고속력 20노트, 승조원 52명이며 어뢰발사관은

533mm 6문(어뢰 및 대함미사일 18발), 특이하게

휴대용 대공미사일인 SA-N-8 8발을 탑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킬로 급은 구소련 제 디젤 잠수함 중 수출에 크게

성공한 형식으로 중국은 전기형(877형) 4척과

후기형(636형) 8척, 도합 12척을 도입했으며,

인도도 877형을 10척 도입했다.

이란이 3척을 도입해 페르시아 만에서 미 해군을

긴장시킨 바 있으며, 그 외 알제리 2척, 루마니아와

폴란드 각 1척을 보유하고 있다.

최근 베트남에 6척 전후 도입이 발표된 바 있다.

본가인 러시아 해군은 14척을 운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군항공대는 스페인 제 C-212/200 초계기 3대와

AB-212 대잠 헬리콥터 8대가 주력이다.




* AB-212 대잠 헬리콥터는 이탈리아가 UH-1을

기본으로 독자적으로 개량한 기체로 루포 급

호위함을 도입할 때 함께 도입한 기체이다.

SH-60 시 호크 시리즈에 크게 뒤처지지 않는

기체 성능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 러시아 제 MI-17V-5 헬리콥터 6대를

도입해 해상기동 수송전력을 보강했다.




해병대는 11대의 LVTP-7 상륙용 장갑차와

25대의 EE-11 우루투, 10대의 푸크 장갑차를

보유하고 있다. 대대 급 상륙작전이 가능한

수준의 능력이다.

화력은 105mm 견인포 12문, 120mm 박격포

18문, RBS-70 미사일 12기를 보유하고 있다.

by 붉은10월 | 2010/02/02 01:11 | 뒤죽박죽 밀리잡학 | 트랙백 | 덧글(6)
[밀리잡학] 베네주엘라 군사력 현황(2)

지상군




프랑스 제 AMX-30 전차 84대, AMX-13C

경전차 36대, 영국제 스콜피온 90 경전차 50대를

보유하고 있음.

주변국에 위협을 줄 규모나 성능의 전차 전력은

아니다.




그러나 2009년 러시아 제 T-72S 92대 및 T-90

전차 도입을 추진하고 있어 2010년대 브라질 및

콜롬비아 국경선에서 양국을 향해 위협을 줄 수

있다.

* T-72S 도입 후 T-90 도입을 추진하고 있으나

T-72S로 만족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개량이 가해진 T-72S의 경우 T-90을 추가로

반드시 도입해야 할 성능 상 필요는 굳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100대 수준의 3세대 초기 형 전차를

보유하게 된 것은 분명하며 이로 인해 남미에

유럽의 군축으로 잉여가 된 중고 레오파드 2

전차 도입 붐이 일어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장갑차 전력은 AML-245 10대, 드라곤 300

100대, 병력수송 장갑차는 프랑스 제 AMX-VCI

25대, V-100 100대, AMX-13 VTT 75대,

EE-11 우루투 100대 등을 보유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기계화부대 전력으로는 한계가 있다.

향후 러시아 제 BMP-3 135대를 도입하게 되면

공세적인 기계화 부대 전력으로 재편될 것이다.




* BMP-3를 도입하게 되면 그 수륙양용 성능을

살려 MBT보다 오히려 더 주변국에 위협적인

세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남미에서라면 BMP-3는 경전차 급을 넘어선

화력으로 제 몫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

포병전력은 프랑스 제 FMK3 15대 및 M109

자주포 5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M114 155mm

견인포 12문, 105mm M56 40문, M101 40문,

120mm 박격포 65문, 81mm 175문, 60mm 100문,

160mm AMX-13/LAR 20문 등을 보유하고 있어

역시 위협을 줄 만한 전력은 아니다.

대전차무기로는 M40A1 106mm 무반동총,

칼 구스타프, AT-4, 마팻 2 로켓포 등이 사용되며

도입한 지 오래된 구형 프랑스 제 SS-11 대전차

미사일은 폐기되었다.




대공무기는 롤랜드 미사일 6개 시스템, 토르 M1

대공미사일 12기, 지라페 사통장치 지원을 받는

RBS-70 대공미사일, 트럭 탑재식 미스트랄

대공미사일이 운용되며 SA-18 이글라 대공미사일을

러시아에 발주한 바 있다.



대공포는 20mm 2연장 및 35/40mm 2연장 36문,

플라이캣처 사통장치 지원을 받는 40mm/L70 18문,

40mm/L60 40문 등이 있다.




육군항공은 G-222 수송기 2대, 아라바 201/202 3대,

M-28 스카이트럭 8대, 멀린 2대, 수퍼 킹 에어 200

3대, 세스나 182/206 7대, MI-17 V 20대, MI-35

10대, MI-26 3대, 알루엣-3 12대, A-109 9대,

벨412EP 8대, 벨205A1 2대, 벨206B 2대, UH-1H

6대, AS61 4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프랑스 제 알루엣

-3을 대체하기 위해 러시아제 MI-26과 MI-17 등

수송헬기 22대를 추가 도입하고 있다.

또한 MI-28 공격헬기 10대가 발주되어 4대가

인도되었다.




* MI-28 HAVOC 공격헬기는 남미에서는 독보적인

전용 공격 헬리콥터로서 AH-64 아파치에 크게

밀리지 않는 성능과 체급을 가진 공격헬리콥터이다.

원래 구소련의 차기 공격헬기 자리를 놓고 KA-50과

자웅을 겨루다 패배했으나 이후 소련 붕괴 후의 혼란

와중에 KA-50도 제대로 양산되지 않던 도중에 오히려

양산대수는 앞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전차 전용 30mm 기관포와 16발의 대전차미사일,

로켓탄 등과 함께 자위용 공대공미사일 탑재도 가능함.




* MI-35 HIND 업그레이드 버전은 MI-24 HIND의

성능향상형으로 대전차 전용 공격헬기는 아니지만

HIND 특유의 성능을 살려 병력수송과 공격 및 무장

헬기로서의 양자를 모두 충족시키는 공격헬기이다.

베네주엘라 육군의 전력은 6만 명 수준으로 아직은

주변국을 제압할 정도는 아니나 향후 차베스 대통령의

군사력 확장 정책이 지속되면 러시아 제 무기로

재무장하여 콜롬비아, 브라질 군과 군비경쟁이 점차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by 붉은10월 | 2010/02/02 01:10 | 뒤죽박죽 밀리잡학 | 트랙백 | 덧글(0)
[밀리잡학] 베네주엘라 군사력 현황(1)



공식국명 /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

수도 / 카라카스

공용어 / 스페인어

정부형태 / 대통령(우고 차베스 현임)

독립 / 1811년 7월 5일(스페인으로부터)

면적 / 916,445km² (33위)

인구 / 28,199,822명 (40위)

GDP / $3,350억 (30위)

통화 / 볼리바르 후에르떼

남아메리카 대륙 반미자주의 상징 차베스의 나라




베네주엘라는 미국과 카리브 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위치로 지정학적으로도 카리브 해의

쿠바 등 반미 국가를 포위하는 위치에 있으며

세계 유수의 산유국이기도 해 미국의 화석연료

전략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진 나라이다.




풍부한 석유자원을 바탕으로 경제규모는 상당한

규모이며 미국이 한때 군사원조를 통해 남미대륙

북부의 유력국가로 지원하기도 했던 국가이다.

* 한때 남아메리카 유일의 F-16 운용국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차례 군사쿠데타를 꾀하다 합법적 선거를

통해 집권한 뒤 반미자주화 노선을 내세우면서

미국의 패권을 부정하고 시몬 볼리바르의 통합된

남아메리카 연방정신을 표방하는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집권 - 그리고 미국의 배후 지원을 받은

수차례의 군사 / 경제 쿠데타와 사보타지를 넘어

집권기반을 공고히 굳힌 현재까지 - 이후 베네주엘라는

지속적으로 미국과 대결 구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부실한 군비를 증강하기 위해 오일머니의

일정부분을 꾸준히 투입함은 물론 중국, 러시아와의

군사적 유대관계를 꾸준히 다지고 있어 미국에게는

눈에 가시를 넘어 대들보가 되어가는 실정이다.




특히 단순한 반미 독재자와는 달리 남아메리카

경제 공동체를 추진하면서 상당부분 호응을 얻고

있고 주변 빈국에 에너지 자원을 낮은 가격으로

지원해 세를 확산하고 있기도 하다.

국내에서도 빈곤층에게 교육을 지원하고 저가에

생필품을 제공하는 등 빈부격차가 극심한 자국

사정을 잘 통찰하고 통치기반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차베스 일인 중심의 통치 권력을

띄고 있어 이 정권의 장래에 대해서는 여러 입장이

분분한 실정이다.

그러나 21세기 사회주의를 내세우면서도 남미대륙

역사에 조예가 깊은 이들이라면 정서적으로 호응을

받기에 좋은 “볼리바리안 혁명”이라는 구호를 자주

사용하는 등 만만치 않은 정치감각을 가진 이 걸출한

정치가와 베네주엘라의 이후 행보는 국제정세에 있어

한동안 주요한 키워드가 될 전망임은 분명하다.

정치-외교적 문제는 차치하고 아직은 미국과

본격적으로 대결하기에는 극히 미약한 수준이지만

주변국들에 대해선 상당한 압력으로 성장하고 있는

베네주엘라의 군사력 현황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아울러 베네주엘라의 군비증강에 맞물려 인접국인

콜롬비아와 브라질의 군비도 증강되고 있어 남아메리카

대륙은 전반적인 군사화의 길을 걷고 있음도 함께

고찰해야 할 것이다.


by 붉은10월 | 2010/02/02 01:09 | 뒤죽박죽 밀리잡학 | 트랙백 | 덧글(2)
[밀리잡학] 인도와 파키스탄 해군력 현황(8)

대잠초계기

 

인도

 

 

IL-38 메이 5대

 

IL-38 메이는 1967년부터 구소련 해군항공대에

배치되었으며 냉전 시기에는 미국의 P-3에 대응하는

대잠초계기로 알려진 기체이다.

 

구소련 해군 교리에서는 IL-38이 중거리 해역

(해안에서 2,000킬로미터까지)의 초계를 담당하고,

TU-142가 장거리 해역(2,000 ~ 4,000킬로미터까지)

의 초계를 담당했었는데 인도 해군 역시 두 기종을

병행 운용하면서 구소련 해군의 교리를 유사하게

채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도 러시아 해군은 50여 대 중 30여 대를

여전히 운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 해군은 1975년에 5대를 도입해 운용하고

있으나 노후화되어 교체기종으로 미국의 신예 대형

대잠초계기 P8 포세이돈이 유력하게 떠오르고 있다.

 



최근 인도 해군과 미국 해군이 중국 해군 견제를

위해 군사 협력을 강화하면서 구소련 계열 대잠

초계기를 미국의 최신 대잠초계기로 교체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TU-142 베어 8대

 

냉전 시기 전략폭격기로 유명한 TU95 베어의

파생형으로 대잠초계형이 TU142M 베어 F이다.

 

인도는 해상초계를 위해 8대를 도입해 현재까지

운용 중이며 러시아 본국에서도 60여 대를 계속

운용하고 있다.


대잠헬기 세력



영국제 시킹과 러시아제 KA-27 헬릭스 계열을
주력기종으로 사용하고 있다.

시킹은 대형, 헬릭스는 중형 헬리콥터 사이즈에
해당된다.



영국과 러시아의 영향이 큰 해군 수상함 무기체계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근래 자국산 HAL DHRUV 헬리콥터를 양산하면서
해군용으로도 버전을 제작해 신형함부터 배치하는
중이다.


 

파키스탄

 



P-3C 3대

 

P-3CK 7대(도입 진행)

 

파키스탄 해군은 인도 해군의 잠수함대를

의식해 P-3C를 소량이나마 도입해 운용하고

있으며 미국 해군에서 보관 중인 초기형

P-3를 업그레이드한 P-3CK 7대를 도입

진행 중이다.

 

* 이 기종은 우리 해군이 도입하기로 한

8대의 추가 대잠초계기 기종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잠수함 추적용 신형 레이더 시스템에

대한 미국 정부의 수출 허가가 나지 않아

현재 2년 가까이 도입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잠헬기 세력

역시 파키스탄도 영국의 영향으로,
하지만 인도가 보다 대형인 시킹을 운용하는 데
비해 소형인 링스를 운용하고 있다.




 

21세기 초반의 인도 - 파키스탄 해양력 대결

 

현재로는 해군 뿐 아니라 육군과 공군,

전략차원의 무기체계 모두 인도가 대국의

저력으로 파키스탄을 완전히 밀어붙이는

실정이다.

 

육군의 경우 워낙에 규모 자체가 차이나는

측면이 강하고 장비 운용 및 후방지원체계

문제는 양측 다 별로 좋지 않기 때문에 쪽수로

앞서는 인도의 판정승이 될 터이다.

 

겉보기로 승부하는 주력전차의 경우에도

파키스탄이 T80UD라면 인도는 T90S로

맞서는 등 별 차이가 질적으로 없으니 오직

물량으로 승부가 날 것으로 보인다.

 

공군의 경우 숫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인도가

SU30MKK를 140대 이상 면허생산하고

MIRAGE2000과 MIG29 역시 적지 않은

수량을 운용하면서 F16 전기형에 그치고

있는 파키스탄이 현저하게 밀리는 실정이다.

 

전략무기체계인 핵미사일의 경우에도 인도는

3대 투발수단(탄도미사일, 전략원잠, 폭격기)을

모두 갖추는 셈인지라 탄도미사일 외에 발사할

수단이 제한된 파키스탄이 취약한 편이다.

 

그러나 파키스탄이 중국과 군사동맹을 강화해

인도를 압박하는 방식을 취하면서 인도는 오랜

비동맹 그룹 리더 역할을 포기하고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해 이에 대응하려는 중이다.

(파키스탄은 미국, 중국과 모두 동맹관계가

인도에 비해 강했으나 요즘엔 그것도 아닌 셈)



 

무기 도입에 있어선 여전히 미국과 프랑스,

특히 러시아가 양국에 군비경쟁을 부추기면서

열심히 팔아먹는 모습이 세기가 바뀌어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결국 재주는 양국의 국민들이 넘고 돈은 이방인이

- 그것도 수백년 간 자신들을 뜯어먹고도 모자란 -

챙기는 형국이 지속되는 것이다.

 

아시아의 대국들이 미몽에서 깨어나 국민들

복지에 군비를 투입하는 시기는 과연 언제쯤...



 

도용한 문헌

<현대 해군의 수상전투함> / 군사연구

<현대 해군 잠수함> / 군사연구

<세계의 항공모함> / 멀티매니아호비스트

<KODEF 군용기 연감> / 플래닛미디어

by 붉은10월 | 2010/01/19 11:44 | 뒤죽박죽 밀리잡학 | 트랙백 | 덧글(2)
[밀리잡학] 인도와 파키스탄 해군력 현황(7)

파키스탄

 

인도의 가파른 신예 잠수함 도입에 대응해

프랑스 제 아고스타 90B 3척 도입을 완료하고

추가로 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으나 예산

문제로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특히 ATV 공격원잠에 대적할 전력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인한 전력 공백이 우려되는 실정이다.


* 근래 프랑스에서 도입선을 변경해 독일의 214급을 
3척 도입할 계획을 추진 중이라 한다.
인도는 독일에서 프랑스로, 파키스탄은 프랑스에서
독일로 도입선을 바꾸는 것이 흥미롭긴 하다.



아고스타 90B급 디젤잠수함 3척

 

아고스타 70B급 운용 이후 프랑스가 자국 해군을

위해 개발한 개량형인 아고스타 90B급 3척을

파키스탄 해군은 도입했다.

 

1번함은 프랑스 DCN에서, 2/3번함은 부품을

공급받아 파키스탄 내 조선소에서 면허생산을

통해 취역시킨 바 있다.

 

기본설계는 앞선 모델인 70B급과 거의 같으나

전투시스템과 새로운 고장력강을 도입하는 등

변화가 있었다. 특히 자동화 시스템이 대량으로

도입되어 승무원이 70B의 2/3 수준으로 줄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고스타 90B급의 전투시스템은 프랑스의

전략 / 공격원잠에 탑재된 전투시스템의 축소판

버전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3번함은 프랑스 고유의 AIP 추진체계인

MESMA 시스템을 탑재해 배수량이 200톤 이상

증가하고 전장도 9미터가 늘어났다.

 



카리드(아고스타 90B) 급 디젤잠수함 제원

 

수상배수량 1,510톤

수중배수량 1,760(1,960)톤

전장 67.6(77)미터

전폭 6.8미터

홀수 5.4미터

안전잠항심도 320미터

최고속력 20노트

최대항속거리 15,700킬로미터

승조원 36명

어뢰발사관 533MM 4문

(F-17P MOD 2 / 엑조세 20발)



 

아고스타 70B 급 디젤잠수함 2척

 

파키스탄 해군은 다프네 급 도입 후

신형 잠수함으로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프랑스에게서 도입하려 했으나 인종차별정책

관련 UN의 대 남아공 무기금수조치로 취소된

아고스타 70B급 2척을 1979/1980년에 각각

1척씩 취역시켰다.

 

1985년에 어뢰 외에 잠대함 하푼 미사일을

탑재하는 개량을 실시해 현재까지 운용하고 있다.

 

하시마트(아고스타 70B) 급 디젤잠수함 제원

 

수상배수량 1,490톤

수중배수량 1,740톤

전장 67.6미터

전폭 6.8미터

홀수 5.4미터

안전잠항심도 300미터

최고속력 20노트

최대항속거리 15,700킬로미터

승조원 59명

어뢰발사관 533MM 4문

(F-17P / 서브하푼 20발)

 

다프네급 디젤잠수함(훈련용) 1척

 

프랑스의 베스트셀러 수출형 잠수함으로

현재 파키스탄 해군에선 1척만 훈련용으로

운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프네급 디젤잠수함 제원

 

수상배수량 869톤

수중배수량 1,043톤

전장 57.8미터

전폭 6.8미터

홀수 5.2미터

안전잠항심도 300미터

최고속력 16노트

최대항속거리 6,880킬로미터

승조원 55명

어뢰발사관 550MM 함수 8문, 함미 4문

(12발)

by 붉은10월 | 2010/01/19 11:43 | 뒤죽박죽 밀리잡학 | 트랙백 | 덧글(0)
[밀리잡학] 인도와 파키스탄 해군력 현황(6)



209-1500급 디젤잠수함 4척

 

인도 해군은 냉전 시기 동-서 양 진영의 잠수함을

병행 장비하고 있다.

 

구소련에서 폭스트로트급을 최초로 도입 운용해

왔으며 킬로급을 후속함으로 1985년부터 도입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당시 서독으로부터 수출형 디젤

잠수함인 209-1500급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인도 해군의 209-1500급은 베스트셀러 수출용

디젤 잠수함인 209급 중에서 가장 대형으로

1/2번함은 독일에서, 3/4번함은 인도에서 건조되어

배치 운용하고 있다.

 

다른 209급과는 달리 비상탈출용 캡슐을 설치해

생존성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4척 도입 후 추가건조 계획이 있었으나 예산 문제로

포기한 바 있다.



 

시수마르(209-1500) 급 디젤잠수함 제원

 

수상배수량 1,450톤

수중배수량 1,850톤

전장 64.4미터

전폭 6.5미터

홀수 6미터

안전잠항심도 260미터

최고속력 22노트

최대항속거리 14,800킬로미터

승조원 40명

어뢰발사관 533MM 8문

(SUT MOD 1 14발)



 

킬로 급 디젤잠수함 10척

 

인도 해군은 1970년대 초부터 폭스트로트급을

운용한 뒤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구소련-러시아로부터 10척의 킬로급 대형 디젤

잠수함을 도입했다.

 

초기에는 기온이 높은 인도양의 열대해양에서

디젤 축전지가 문제를 일으키는 등 논란이 발생해

성능에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외국의 기술을 도입해

개량을 완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 해군은 킬로급에 대함미사일 운용능력을

부여하고 있으며 10척 모두 완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함미사일 운용은 ALFA / CLUB-S /

3M54E 등이 운용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 해군이 도입한 킬로급은 전기형인 877EM

버전으로 알려져 있다.

(후기형은 636형 버전)



 

신드후고시(킬로) 급 디젤잠수함 제원

 

수상배수량 2,325톤

수중배수량 3,076톤

전장 72.6미터

전폭 9.9미터

홀수 6.6미터

안전잠항심도 300미터

최고속력 17노트

최대항속거리 11,100킬로미터

승조원 52명

어뢰발사관 533MM 6문

(TYPE53-65 / SAET-71 18발)

대함미사일, SA-N-8 단거리 SAM

 

폭스트로트 급 디젤잠수함(훈련용) 2척

 

인도가 도입한 최초의 현용 잠수함으로서

원래 인도는 1965년 파키스탄과의 2차 전쟁 후

영국과 잠수함대 창설을 위해 교섭을 진행했지만

실패하고 구소련과 교섭해 1968 ~1975년 사이에

폭스트로트 급 디젤잠수함 수출용 버전을 8척

도입해 잠수함대를 편성한 바 있다.

 

폭스트로트 급은 1980년대 말에 2척이 퇴역하고

2000년대 초반에 4척이 제적되어 수리용 부품으로

전용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 현대화 개량이 실시된 초기함 2척이 훈련용도로

운용 중이지만 스콜펜급 도입과 함께 곧 퇴역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쿠스라(폭스트로트) 급 제원

 

수상배수량 1,952톤

수중배수량 2,475톤

전장 91.3미터

전폭 7.5미터

홀수 6미터

안전잠항심도 250미터

최고속력 15노트

최대항속거리 37,000킬로미터

승조원 75명

어뢰발사관 533MM 함수 6문, 함미 4문

(SET-65E / SAET-60 22발)

by 붉은10월 | 2010/01/19 11:42 | 뒤죽박죽 밀리잡학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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