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FF] 가부키초 러브호텔, 시큰둥한 듯 따스한 카메라


히로키 류이치 감독은 국내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던 <바이브레이터>(2003년)부터
줄곧 주변부나 밑바닥 인생들을 조명하는데
애착을 가져왔다.

물론 감독에게 일본 국내에서 흥행감독
타이틀을 달게 해준 <4월의 신부>(2009년)
("여명 1개월의 신부"로도 알려진 그 영화)
나 시대극 <번개나무> 등의 작품도 필모그래피
중 잘 알려진 작품이긴 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핑크영화 작업에 종사했던 경력으로나
<바이브레이터>, <M>등으로 국내에 소개된 면모로 볼 때나
소외된 풍경들을 비추는 작업들은 히로키 류이치 감독과
잘 어울려보인다.

이번 신작 <가부키초 러브호텔>은 일본 내에서 흥행과
작품성 모두 인정받는 중견감독의 대열에 자리잡은
히로키 류이치 감독이 어느 정도 안정된 캐스팅과 여유를
갖고 펼치고 싶은 내용들을 맛깔나게 늘어놓은 뷔페 같은
느낌이다. 그만큼 풍성하고 알차다.

제목 그대로 동경의 환락가 가부키초의 한 러브호텔
- 호텔이라 하지만 규모로 보나 풍경으로 보나 딱
우리나라 술집골목의 커플손님 위주로 장사하는 모텔급 -
직원들과 손님들의 24시간을 다룬다.

근래 또래 배우들 중에서도 주목할만한 이력을 계속
추가하고 있는 연기력 절정의 소메타니 쇼타와,
일본 최고의 아이돌그룹 멤버에서 여배우로 성공적으로
변신과정을 밟고 있는 마에다 아츠코가 남녀 주연으로
출연하고,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를 통해 연기경력을
일변한 후 최초로 해외작품에 출연한 이은우, 그리고
잘 알려진 중견배우들로 일드만 챙겨봐도 얼굴이 익숙할
마츠시게 유타카와 미나미 카호 등이 주연급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 외에도 이 영화에는 감초같은 연기력의
조연급 배우들과 단역이지만 각자의 롤이 분명한 많은
연기자들이 출연한다.

굵직한 스토리텔링에 따라가는 줄거리라기보단
각자의 사연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을 한데 아우르는
공간으로 러브호텔이 사실상 핵심적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겠다. 여러 사연을 품은 이들, 주류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겐 관심거리가 되지 못하거나 하찮게
보여질, 혹은 차갑게 스쳐지나가버릴 군상들을
24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영화는 그들 각자의 스토리를
펼쳐주면서 때로는 이미지로, 때로는 몇 마디 대사로
하소연할 기회를 만들어준다.

실로 다채로운 존재들이 그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실직 위기에 처한 이들,
학비를 위해, 혹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약간의 돈을
벌기 위해 유흥업에 뛰어드는 젊은 여성들, 그런 그녀들과
관계맺는 관련업종의 남자들, 그리고 거리를 자유롭게
다니기엔 뭔가 캥기는 게 있는 남녀들, 정상적인 세상에
편입되지 못한 채 숨어다니는 사람들이 호텔 주변에는
가득하다. 범죄자와 변태도 등장하며 성인 비디오 촬영이나
우발적인 폭력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하지만 어쨌건 그곳도 사람 살아가는 곳이고 그곳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각자의 꿈이나 미래에 대한
고민이 있음을 감독은 조근조근 비춰주면서 심드렁한 척
시크하게 흘려보내는 것 같다.

특히나 일본사회의 우경화와 더불어 3D업종에 종사하거나
주변부에 있는 외국인, 특히 재일한국인에 대한 언급이
영화의 밸런스를 깨트릴 만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감독이 현재의 우경화 경향에 대해 직접적인 발언 대신에
상당한 부담을 감수하고 영상으로 소신을 비추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일본어로 소통해도 별 무리가 없는 대사도
은근히 한국어로 녹음된 게 많고, 지나가는 풍경이라도
혐한 시위와 이에 대항하는 시위 모습을 꽤 자세하게
묘사해 보여주며, 일본 내에서 그릇되게 변질되거나
상술에 찌들어가는 한류문화에 대한 풍자도 자주
등장한다.



사실상 영화의 진주인공급인 이은우 씨의 열연을 통해
유흥산업에 종사하는 일본내 한국인들에 대한 묘사도
자연스럽고도 상세하게 펼쳐진다.

이 정도로 자세한 묘사는 분명히 치밀한 조사와
상당한 시나리오 분량 할애를 동반했을 터인데
히로키 류이치 감독의 의중이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영화는 크게 셋 또는 넷의 이야기가 동시 병행적으로
진행된다.

1. 러브호텔 점장으로서 소메타니 쇼타가 겪는
호텔 내 자질구레한 사건 처리

2. 소메타니 쇼타와 마에다 아츠코 커플의 긴장

3. 이은우와 한국인 남친의 일본 내 생존기

4. 마츠시게 유타카와 미나미 카호의 도피전기

러브호텔의 사건사고가 가장 원심력을 가지고
나머지 이야기들이 그 속에서 각자의 자리를 잡는
식인데 이게 말로야 쉽지 감독이 제대로 고삐 안
움켜쥐고 가면 그야말로 중구난방 모래성이 되기
딱 좋은 스토리다.

히로키 류이치 감독의 내공이 빛을 발하는 편집이며
각자의 이야기가 서로서로 연관을 맺어가면서 끝으로
향하는 구성은 24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내에서
일어나고 마무리짓는 구성으로 인해 135분이라는
적지 않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늘어지지
않는 호흡으로 관객을 조련한다.

소메타니 쇼타는 특유의 심드렁한 이미지와
간혹 폭발하는 응어리를 함께 가진 캐릭터 연기에
동년배 그 누구보다 강력함을 드러내고 있고
여동생과 얽히는 에피소드에선 후쿠시마 대지진과
원전누출사고에 대한 감독의 발언을 느끼게 해준다.



마에다 아츠코는 출중한 비쥬얼과 이제는 아이돌에서
내려와 젊은 여배우로서 극중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단계에 돌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감독의 배려일까, 마지막 엔딩 송을
도맡아 노래하는 그녀에게서 "아이돌"이 아닌
"가수"의 면모를 오랜만에 보는 것도 반갑기만 하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극중에서의 마에다
아츠코는 AKB48의 센터 앗짱이 아닌, 노래하는 연기자
마에다 아츠코로 화면 속에 자리잡는다.



이은우는 20대 연기경력 대부분을 그저 그런 작품
속에서 흘려보내다 <뫼비우스>에서 파격적인 캐릭터로
다시 주목을 받았지만 어떻게 보면 선정성이 거품으로
끼어있는 느낌이었는데 최초의 해외진출작에서 여러
장벽이 있었을텐데도 큰 비중을 갖고 아직은 마에다
아츠코가 해내기 주저하는 '쎈' 장면들을 대신 소화하며
자연스럽게 극적 비중을 높였다.



영화 속에서 가장 긍정적인 캐릭터이기도 하고,
생활을 위해 밑바닥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선함을
잃지 않는 역할이지만 갈등과 고민도 적지 않은
현실적인 인물상을 잘 보여준다.
(상대역의 남자배우는 이은우 씨가 워낙 열연을 해서
존재감이 투명해져버렸다. 어쩔 수 없는 부작용)

미나미 카호와 마츠시게 유타카, 탄탄한 경력의
중견배우 커플과, 이들과 엮이는 불륜경찰 커플은
안정된 연기력을 갖추고 영화 내내 개그 부분을
담당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범죄자로 낙인찍힌
이들에게도 그 나름의 사연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그래도 워낙 탄탄한 연기력 기반으로 자칫
스산한 에피소드들의 조합으로만 흘러갈
위험을 빵빵 터져주는 유머짤로 슥슥 넘겨주는데
탁월한 효능을 발휘한다. 그것도 맨 마지막까지.

이렇게 글 쓰고 있으면 <가부키초 러브호텔>이
그저 시트콤스러운 내용으로 비춰보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밑바닥 주변부 사람들이 엎치락 뒤치락
살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라면 드잡이를 하거나 뒷목 잡고 넘어갈 법한
일들 투성이다.

그렇지만 한바탕 지나고 나면 그래도 세상은
포기하기보단 앞으로 나아갈만하다는
그런 느낌...

영화 마무리에서 새벽아침 해가 뜨고
가부키초를 떠나는 이들을 비추는 카메라는 그래서
따스하게 느껴지는가 보다.

by 붉은10월 | 2014/10/21 21:46 | 2014 BIFF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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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bender at 2014/10/22 09:36
이런 소재가 쓰이는 거 보면 일본 내에서도 고생하는 한국인이 많다는걸 새삼 느끼게 되네요

물론, 같이 고생하는 일본 서민층도 있겠습니다만...
Commented by 붉은10월 at 2014/10/22 09:43
관객과의 대화 때 감독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던 부분인데
시간관계상 못하게 되어 너무 아쉬웠습니다.

자이니치 문제야 일본사회에서 뿌리깊은 실재이니까요.
브라질 역이민과 근래 동남아 이민자 문제와 함께 상당한
실체가 있구요. 뭐 홋카이도 쪽에는 러시아도 어업 등으로
왕래가 잦구요.

히로키 류이치 감독이 하층민과 주변부 인생에 꾸준히
천착하는 작품활동을 해왔지만 이번 재일한국인 비중은
비정상적으로 높아서 나중에 인터뷰라도 꼭 찾아볼
생각입니다.
Commented by 만일이 at 2016/01/05 00:14
저도 우연히 티빙에서 이 영화를 접했는데 무거운 영화 치곤 흡입력 있게 봤습니다. 4개의 시점에서의 각자가 지닌 무거움과 이를 풀어나가는 방식, 그리고 종결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더군요. 어떻게 보면 무겁고 어두운 각자의 일면속에서 살려고 바둥거리는 소시민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리뷰 잘 보고 갑니다! :)
Commented by 붉은10월 at 2017/01/22 05:22
복잡한 이야기들을 정교하게 엮어가는 능력이 돋보여 역시 감독에게 관록이란!? 하며 봤던 작품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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