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FF] 돌에 새긴 기억, 카메라에 담기는 기억


변두리 구석진 영화관.

아이 하나가 영사기사인 아버지를 찾아
영사실에 들어선다.

극장 안에서는 숨죽인 몇몇이 영화를 본다.

1982년작, 알마즈 귀니의 <욜>이다.

곧 이라크 정보부와 경찰이 들이닥쳐
관객과 영사기사를 잡아간다.

아이는 겁에 질려 그 광경을 지켜본다.

시간이 흘렀다.

후세인이 몰락하고 쿠르드인들은
이라크 내에서 쿠르디스탄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자치정부를 얼기설기 꾸려서 살아간다.

어릴적 아버지의 체포를 숨죽여 보던 아이는
독일에서 영화감독이 되어 쿠르디스탄으로
돌아와 1988년 쿠르드 민족 학살사건을
영화화하려 한다.



쿠르드민족이라면 잊지못할 학살 사건이지만
누구도 자기의 부인이나 딸, 여동생을 영화에
출연시키려 하지 않는다.

감독은 이란에서 쿠르드 족 여배우를 데려오려
하지만 쿠르드인들에게 까다로운 국경수비대에
행정서류 미비로 억류되어 실패하고 만다.

영화 투자를 위해 쿠르드 계 인기 가수를
주연 배우로 캐스팅하지만 그는 연기에 대한
열정이나 민족의 수난을 다룬 영화 작업에
대한 존중보다는, 영화를 매개로 그가 관여하는
돈벌이 사업에 한눈을 팔고 있다.

어렵사리 연기경험은 일천하지만 열정을
가진 교사 출신 여성이 찾아와 캐스팅되지만
법적 후견인인 큰아버지와 그녀와 결혼하려는
사촌의 반대에 부딪혀 촬영 내내 살얼음판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제작비는 계속 부족하기 짝이 없고 기회를
노릴새라 주연 남자배우는 자신이 감독까지
차지하려 하거나 제멋대로 내용을 바꾸자고
간섭하기 일쑤다.



난민촌에서 데려온 엑스트라들은 연기경험이
없을 뿐더러 통제도 잘 되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가 완성되더라도 쿠르디스탄
내에서 제대로 상영 배급이 이뤄질지도 의문인
상황이다.

여배우는 사촌에게 결혼해주겠다고 설득해
간신히 연기를 할 수 있었지만 촬영현장의
자잘한 사고나 다른 배우와 어울리는 연기를
보다못한 사촌에게 강제로 끌려가는 일이
빈번하고 결국 후견인인 큰아버지와 의절하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집념을
보이며 영화에 몰입한다.
(그 이유는 이 영화의 제목과 관련이 있다)



감독은 독일의 안정된 가정과 환경을 버리고
황무지 같은 쿠르디스탄에서 영화 작업에
몸과 마음을 다 갈아넣는 행위를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가족과도 멀어져간다.

우여곡절의 끝판왕은 영화 때문에 아내를
빼앗겼다고 망상에 빠진 주연여배우의 사촌이
감독에게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다.

감독은 하반신 불구가 되고 병상에서 촬영기사에게
스크립트를 만들어가며 원격으로 현장을 지휘하고,
부족한 제작비는 프로듀서의 집을 팔고 총격으로
수감된 사촌 가족의 합의금으로 메꿔가면서 결국
영화를 완성한다.

학살이 벌어졌던 감옥 야외에서 어렵사리
마련된 시사회. 그러나 열악한 쿠르디스탄의
현실을 반영하듯 극장이 없어 선택한 야외상영조차
정전과 발전기 고장으로 중단된다.

초청된 관객들은 투덜거리며 시사회를 떠나고,
비까지 쏟아지는 가운데 겨우 재개된 시사회에서
완성된 영화를 감독과 스탭, 주연여배우와 그녀의
사촌만이 만감이 교차되는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영화는 끝난다.

감독 사우캇 아민 코르키는 쿠르드 인으로
<크로싱 더 더스트>, <킥오프> 등의 작품에서
민족적 정체성과 어지러운 중동의 현실을 반영하는
작업을 거듭해 왔다.



다소 밝은 톤으로 만들었던 <킥오프>에 이어
가져온 <돌에 새긴 기억>은 쿠르드와 중동의
현실을 반영하듯 답답한 악전고투의 연속이다.

알마즈 귀니의 <욜> 제작과정에 대한 오마쥬로
펼쳐지는 영화 속의 영화 제작과정은 굳이
쿠르드 영화 만들기가 아니더라도 작가정신을
갖고 영화를 만드는 지구상의 모든 이들이
겪어야 할 문제들을 압축해 보여주고 있다.



쿠르디스탄 자치정부는 그나마 현재 이라크
국경 내에서 영화가 만들어지는 거의 몇 안 되는
공간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환경은
최악의 수준이며 쿠르드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쿠르드 민족 문제를 알려내는데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고 그 이점을 나름대로 활용하는 쿠르디스탄
자치정부의 경우를 볼 때도 불합리하기 짝이 없다.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조명하는 영화를 만들려는
사명감에 불타지만 감독은 쿠르드의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쿠르드 지역사회 역시 그런
감독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한다.

감독의 집념, 제작자의 애환, 여배우의 고뇌가
어우러져가며 영화는 마치 프란시스 코폴라가
<지옥의 묵시록>을 찍다 돌아버리는 지경으로
치닫는 필리핀 정글 속으로 들어가버리는
수준으로 종국을 맞는다.

그리고 모든 걸 정화하듯 쏟아지는 비와,
러닝타임 내내 함께 부딪혀가며 영화의 완성에
정이건 반이건 역할을 했던 대표격인 이들의
시선이 뿌연 스크린과 어우러진다.

그렇게 영화는 정화된다. 몇 안 되는 관객이지만
영화는 그에 걸맞는 관객을 찾았다.

영화 속 영화 만들기의 또 하나의 수난기로서
<돌에 새긴 기억>은 카메라에 뭔가를 담아내려
하는 이들의 열정과 집착을 진저리나게 담아낸다.

영화가, 영화인이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발언을 하기 위해 감내해야할 것들의 원형질을
보여주기 위해 <돌에 새긴 기억>은 고유한
역할을 해내는 그런 영화다.


by 붉은10월 | 2014/10/22 13:45 | 2014 BIFF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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