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th BIFF]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




모라토리움, 빨래를 널기까지 필요한 시간

<가을>


일본 야마나시 현 한적한 시골.


고후 스포츠라는 간판을 건 스포츠용품점에서

중년의 아버지는 딸의 속옷을 민망한 표정으로

건조대에 널고, 밥을 차려놓은 뒤 영업을 준비한다.

딸은 첫 등장부터 방바닥에 벌렁 엎드린 민망한

자세로 등장한다. 어라 ~ 분명 주연 여배우는

마에다 아츠코. 일본의 국민적 아이돌 AKB48의

만고불변의 센터였던 그녀가 맞는데.

아버지가 묵묵하게 생업과 가사를 해내는데

추리닝 바람의 말만한 딸래미는 게걸스럽게

밥을 먹어치우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TV 뉴스를 건성건성 흘려보던 중

“일본은 틀려먹었어!”라고 외치지만 별로

진지해 보이지도 않는다. 아버지는 잠깐 눈살을

찌푸리다 말고 부녀는 대화 없이 일상을 이어간다.

그들 부녀는 가끔 언쟁도 한다.

대학까지 마쳐놓고 왜 아무 것도 하지 않냐고.

다소 과장된 칭얼거림처럼 악을 쓰던 다마코는

“어쨌건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독백한다.



 

아버지도 더 이상 다마코를 건드리진 않는다.

다마코의 “가을”은 그렇게 7분여 지속된다.


<겨울>

겨울이 찾아왔다.

야마나시 현의 겨울은 꽤나 춥다.

여전히 다마코와 아버지의 관계는 별 변화가

없어 보인다.

다마코는 가게에 찾아오던 사진관 집 중학생

아들과 그나마 말벗을 튼다.



아버지와 딸은 해를 넘기는 의식으로

함께 메밀국수를 먹는다.

여전히 부녀간에 대화는 거의 없다.

하지만 대문 밖에 기름을 퍼오기 위한

필살의 승부를 걸고 아버지와 가위바위보

대결하는 걸 보면 나름대로 두 부녀는

서서히 적응하고 있다.



연말이지만 어머니가 부재한 다마코네 집에

친척들이 명절요리 - 오세치 - 를 챙겨주고

일찍 결혼한 다마코의 언니가 섣달 그믐에

방문하지만 다마코는 모른 척 웅크린 채다.



“가을”보다는 약간 더 길게, 하지만

10분도 채 모자란 시간에 겨울은 지난다.

<봄>


봄날이 찾아왔다.

여전히 부녀는 시큰둥하게 일상을

함께하고 있지만 다마코는 어설픈

이력서도 작성해 보고 사진관 자제분을

꾀여 증명사진도 찍는다.

아버지는 그래도 딸이 봄이 되니 뭔가

기지개를 켜는구나 하면서 꽤 값어치

나가 보이는 시계를 선물하지만 다마코는

과도한 기대에 부담을 느끼는지 주춤거린다.



그 주춤거림은 어찌 보면 짜증스럽기도

하다. 신경써서 격려한다고 사온 아버지의

선물에 반응하는 모습은 딱 신경질적이다.

뭐 좀 조용히 도모해보려 했는데

딱 들켜버린양 다마코는 성질을 부리며

밖에 나가 혼자 경단을 쌓아놓고

먹어치운다.



밥상에는 봄나물이 올라온다.

세상에 직면하긴 두렵지만 밥은 열심히

꾸역꾸역 먹어치우는 다마코.



봄이 되면서 다마코도 활동량이 조금씩

늘어는 간다. “봄”은 20분 조금 안 되게

흘러간다.

<여름>

가을에서 겨울로, 그리고 봄을 경유한

고후 스포츠의 다마코.




학창시절 동네 친구도 만나지만 다마코는

그저 피하고 싶다. 자신을 마음 편히

내놓고 누굴 만나기엔 아직 준비가 필요한

다마코.

다마코의 어머니와 별거중인 아버지에게

친지가 이혼녀인 시내의 장신구 강사를

소개한다. 아버지는 그녀가 싫지 않아

보인다. 다마코는 부녀 둘만의 관계가

변화의 기미를 보이자 예민하게 반응한다.

갑자기 떠버리가 된 다마코.


온갖 sns에서나 주워들었음직한

가십 이야기를 꺼내고 아버지의 본심을

캐내려 노력한다.


다마코는 모라토리움기가 강제 종료당할까

아직은 두려운가보다.


염탐을 위해 찾아갔다가 정체가 들통나

장신구 강사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다마코. 여름이 되어서 그런가 아버지와의

오붓한 모라토리움기를 지키기 위해서일까

다마코는 주절주절 참 말이 많다.




다마코는 영화 내내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친어머니에게까지 전화로 상담을

시도하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다마코에게 아버지는 굳이

재혼 같은 것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여름이 끝나면 집을 나가라고 한다.


다마코는 내내 그녀를 불안하게만

바라보며 어른답게 따끔한 소리를

하지 않던 아버지가 뭘 하건 집을

나가라고 하자 “합격!”이라고 외친다.


그녀 또한 모라토리움기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음을, 그럴 필요가 없음을

인지하고 있으니. 다만 녹록치 않은

세상에 다시 나가기 위한 누에고치

시절이 필요했었고 그것이 지난

사계절이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부녀의 밥상에는 여름철 입맛 돋우는

반찬인 고야참프루가 올라와 있다.


여전히 다마코는 상황이 어떻던 간에

식욕만은 잃지 않고 있다.


그리고 다마코는 가을 초입에 민망한

속옷까지 아버지에게 널게 하던 것을

이제는 자신이 아버지 속옷까지 옥상에

올라가 널기 시작한다.



사실 그녀는 가사노동을 분담할 의지

정도는 모라토리움기라도 충분히 있었다.


다만 초반에 서먹서먹했던 아버지가

빨래를 딱딱 각 맞춰 안 했다고 핀잔을

주자 그녀만의 방식으로 반항해왔던 것.


여름의 끝자락... 아버지를 제외하면

이 한적한 동네에서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던 나이를 초월한 친구가 된

사진관 아들과 함께 하드를 물고 있던

다마코는 자기도 못해본 연애를 하던

중학생에게 연애는 잘 되어 가냐고 묻는다.



헤어졌다고... 특별히 사이가 나빠진 건

아닌데 그냥 “자연소멸”했다고 말한다.

담담히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듯

동의하며 그들의 사계절을 회상한다.


그리고 30여 분이 넘게 흘러가던

여름이 저물어가면서 다마코의

모라토리움기를 보여주던 화면은

뚝 ~ 하고 멈춘다.


호시노 게ㄴ의 잔잔한 포크 송 <계절>

이 흐르면서 야마나시 현의 여름더위와

다마코의 모라토리움기 시절은 그렇게

하늘의 구름처럼 흘러간다.


아니 <계절> 가사처럼 사라져간다.


노래가 끝나갈 때쯤 예전 홍콩영화

비디오에서 자주 보이던 풍의 메이킹

장면이 조금 등장한다.


다마코로 빙의한 듯한, 혹은 우리가

아이돌로만 상상해왔던 자연인

마에다 아츠코가 촬영현장에서

마치 햇볕을 쬐면서 꾸벅 졸고 있는

고양이같은 모습으로 기대어 누워 있고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은 장난기어린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응시한다.


스탭들도 웃음기를 머금고 함께다.


그렇게 1시간 10여 분 남짓한

러닝타임은 마무리된다.

<야마시타 노부히로&마에다 아츠코>


아이돌 출신의 배우들은 극 전개에

큰 비중이 없는 상업영화의 카메오 수준

조연이 아니면 (연기할 준비가 되어 있건

말건) 일단 주연으로 출동하게 된다.


물론 마에다 아츠코는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모라토리움 기의 다마코>에서

거의 원탑 수준의 주연이지만 흔히 아이돌이

거치는 연기의 정형에서 벗어나 있다.

아니 아이돌이 아니라 그냥 중견 여배우가

한번 쉬어가는 식으로 다른 이미지를 한번

시도해볼 때나 감독이 자기 주관대로 극을

끌고 나가기 위해 아마추어 배우에게 그냥

하고 싶은대로 다 하라고 등을 떠밀며 실제는

배후에서 자신이 뽑아내고 싶은 연출을 할 것

다 하는 그런 방식에 가까운 역할을 아무

위화감 없이 연기하고 있다.



마에다 아츠코는 원래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영화들을 좋아했고 열심히 sns 친목

활동을 통해 함께 작업하고 싶음을 대놓고

희망해 왔었다. 그 결과물이 감독의 전작인

<고역열차> 주연급 캐스팅이다.


그러나 야마시타 감독이 <린다 린다 린다>

처럼 그가 가장 잘 해왔던 연출에서 사회적

분위기를 진하게 가미했던 작업의 연장선에

있던 <고역열차>에서의 마에다 아츠코는

그냥 원작의 영상화에 충실한 배역으로

그칠 수밖에 없어 보였다.


그리고 야마시타 감독의 작품 목록에서도

<고역열차>는 다소 어중간한 시도로

기록되는 느낌이었기도 하고......


몇 편의 작품에서 다소 과잉된 시도를

하던 감독은 다시 그가 가장 잘 하던

방식으로 시골 변두리에서 소소한 일상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연출을

선보였지만 마에다 아츠코를 데리고

그 길로 나아갔다.



감독 또한 자신을
열렬히 지지하며 새롭게
배우로 성장하고
싶은 욕구를 분출하는
이 여배우의 역할을
다시 한번 시험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어디까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고.

하지만 중견 감독이 그런 모험을 마구다지로

저지르기는 쉽지 않은 노릇.

그러나 기회가 금방 왔다.

음악방송 캠페인 Short Film 형식으로

<가을><겨울><봄> 시리즈가 진행되었고

단편영화의 골격을 갖춘 <가을과 겨울의 다마코>

에 이어 장편으로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로

극 중에서 느릿느릿 하지만 전진하는 다마코처럼

야마시타 노부히로와 마에다 아츠코의 작업은

우연한 기회에서 시작되어 느리지만 한발 한발

가지를 치고 잎을 달았다.


이제 국민적 아이돌의 중심에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까지 가십거리가 되던 앗짱을 몰라도

여배우로서 마에다 아츠코를 각인할 수 있는

이미지 한 장을 그녀는 얻게 되었다.




여러 작품을 통해 주목받고 있지만 마에다

아츠코를 “배우”로 인지하게 한 작품은 아마도

<모라토리움 기의 다마코>로 기록될 것이다.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 역시 당대의 아이돌

스타를 그저 평범한 또래의 방황기를 겪는

니트족 - 소녀와 숙녀의 경계에 있는 -

언니로 빙의시켜내면서 스스로 이후 작품

방향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어찌 보면 <마이 백 페이지>와 <고역열차>

같이 강렬한 시대적 배경을 부각시키지 않고

그저 감독의 이전 작품 경향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일지라도, <모라토리움 기의 다마코>

는 그 두 방향을 절충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은근슬쩍 다 해내고 있다.




감독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순정만화적인 일상성과 예민한 사회적 경향을

영화 내내 나오던 절임이나 볶음 반찬처럼

묵묵히 연출해내는 방식은 어쩌면 한때

세계 영화계가 오즈 야스지로 같은 일본의

거장 감독들이 펼쳐 보였던 “다다미 shot"의

아우라를 은은히 풍기게 진화할지도 모른다.


간이 세지 않아 심심해 보이지만 어느 순간

그 맛이 혀에 기억되는 것처럼 이 기묘하고

느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성장 혹은 일상

영화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밥상 위의

반찬과 가게 주변 풍경, 그리고 빨래를 너는

주체의 변화만으로 가을부터 시작되는

사계절 시간의 흐름을 거의 완전하게

화면 속에 복원해낸다.



그런 장면 장면들을
은근슬쩍 이미지로 담아내는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다음, 그리고 그 다음

작품에서 몇 년에 한번씩 마에다 아츠코가

조용히 등장했다 사라지는 풍경을 오래오래

보고 싶다. 여배우로 나이를 먹어가는 마에다

아츠코 시즌제가 되면 더 바랄 게 없겠고......

by 붉은10월 | 2014/11/10 21:32 | 2014 BIFF | 트랙백 | 덧글(4)
트랙백 주소 : http://redoctobor.egloos.com/tb/5255466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bender at 2014/11/20 08:40
현실적인 니트 연기가 아주 맘에 들었던...
Commented by 붉은10월 at 2014/11/20 09:05
그렇죠. 집에서 나가라고 할 때 표정이나 일상 연출이
정말 은근슬쩍 정교한 작품입니다.
Commented by totobi at 2014/12/15 02:13
리뷰를 이렇게 잘쓰시는 분은 오랜만에 보네요...
Commented by 붉은10월 at 2014/12/15 09:01
장황하고 허접하기 짝이 없는지라 그저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인걸요 ㅠ.ㅠ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